[청사초롱] 만추

입력 2020-11-11 04:02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중략)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신경림 ‘갈대’)

코로나 사태로 시작된 한 해가 마감을 달포 앞두고 있다. 올해는 말의 온전한 의미 그대로 일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해였다. 윤달이 낀 해여서인지 평년보다 단풍이 늦되어 찾아왔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초록은 지칠 기색을 보이지 않다 시월 말 들어서야 서둘러 붉거나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꽃은 순간에 피었다가 지지만 초록은 순간에 피어 길게 수를 누리다 간다. 돌아보니 나를 다녀간 인연 중에는 꽃 같은 이가 있었고, 초록 같은 이도 있었다.

바쁜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탓에 귀뚜라미 울음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산국화 한 송이 보지 못한 채 보도블록에 떨어진 낙엽이나 밟으며 마중과 배웅도 없이 가을을 맞고 보냈다. 오늘 이곳을 사는 이들의 대개는 일찍이 서정주 시인이 노래한 ‘국화’를 산과 들에서보다 장례식장에서 더 자주 만나왔을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국화는 봄에 우는 소쩍새와 먹구름 속의 천둥과 가을 무서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공장에서 한꺼번에 부화되는 병아리같이 한날한시에 태어나 생의 긴 여정을 생략한 채 영정 사진 앞에서 사람들(문상객들)을 대해 왔기 때문이다.

십일월은 곡물이 떠나는 전답과 배추가 떠난 텃밭과 과일이 떠난 과수원이 글썽글썽, 무럭무럭 늙어가는 달이다. 단풍이 시나브로 지면서 산이 쇄골을 드러내고 강물은 여위어가고, 새벽 들판 살얼음에 별이 반짝이고, 문득 추억처럼 첫눈이 찾아와 까닭도 없이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는, 죄가 투명하게 비치고 영혼은 계곡물처럼 맑아지는 달이다.

십일월에 나는 호주머니가 많이 달린 외투를 입고 숲을 찾아 주머니마다 정령들을 들여앉힌 뒤 나를 심문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마음만 간절할 뿐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적막한 산길을 걷다가 내가 내는 소리에 스스로 놀라 뒤돌아볼 때 길게 휘어진 길이 귀를 세워 나를 엿듣는 풍경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한다.

산에 들지 못하는 심사를 강변을 걸으며 대신 달랜다. 걷다 보면 순차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특별한 사물들이 있다. 갈대와 억새. 갈대는 투박하고 억새는 섬세하다. 굵고 우직한 직선과 가늘고 부드러운 곡선. 하늘 아래 나란한 타악기와 현악기의 연주가 묘한 앙상블 이룬다. 갈대는 자기 밖의 세계를 안에 품는 형상이고 억새는 자기 안의 사유를 바깥으로 드러내는 형상을 지녔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강을 배경으로 자신을 능숙하게 표현하는 ‘존재자들(자연 사물들)은 존재(신)’를 이러, 저러하게 ‘구현한다.’ 신은 하릴없이 적적하실 때 갈대와 억새를 필기도구 삼아 허공의 백지에 일필휘지하신다. 경전을 대하듯 그 뜻을 새겨 읽는다. 세계 내 편재하는 사물들이 발하는 침묵의 사연을 번역한다. 물론 이때 원전에 대한 누락과 결핍은 불가피하다.

내 생을 다녀간 얼굴들이 외화의 자막처럼 지나간다. 나는 불쑥, 얼굴을 내밀어 오는 어제를 되새김하고 오늘을 성찰하면서 막연하나마 미래를 예감한다. ‘시간과 존재’와의 관계를 궁구하는 것이다. 갈대와 억새와 강물에 번갈아 눈을 주면서 서정성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 시편 ‘갈대’를 조용히 읊조려 본다. 화자 ‘갈대’는 시인의 분신이자 인간 존재를 표상하는 사물이다. 소설가 이호철은 이 시에 대해 “아득하게 잊어버렸던 고향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고향 사람들의 얼굴이 가까이 보이곤 한다”고 했다. 고독과 불안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 숙명을 노래한 시에서 나는 작은 위로와 구원을 얻는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