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청년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법령집과 함께 자신의 몸을 태웠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와 한국민중신학회,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영등포산업선교회 등은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한국교회, 전태일을 기억하다-전태일 50주기 개신교 심포지엄’(사진)을 열었다.
한국민중신학회 회장인 최형묵 천안 살림교회 목사가 ‘노동자의 인간 선언과 그 신학적 메아리’란 제목으로 발제했다. 최 목사는 전태일을 향해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에 맞서 참사람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감리교인이었던 전태일은 그와 가족이 다니던 교회에서 자살한 이의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거부해 재야의 신·구교 성직자들이 그해 11월 25일 합동 추모식을 열었다. 김재준 목사는 추모사를 통해 “우리 기독교도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말했다.
교회사를 전공한 NCCK 100주년기념사업위 손승호 박사는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이 아닌 전태일의 일기 등을 바탕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그의 모습을 소개했다. 전태일은 70년 8월 9일 일기에서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라며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도시 빈민선교를 이끌던 박형규 목사는 시무하던 서울제일교회에 ‘형제의 집’을 개설했다.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전태일의 바람을 노동자와 대학생이 만나 함께 배우는 공간으로 실현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기독교의 저항도 이어져 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가 진행됐고 이듬해엔 NCCK 내부에 인권위원회가 발족하게 된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상담기관인 쉼힐링센터의 홍윤경 소장은 토론을 통해 “지난 50년간 전태일에게 덧씌우고 있던 열사로서의 무거움과 소명의식만 되새기지 말고, 우리 곁의 한 사람, 지금 피땀 흘리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또 다른 전태일의 이야기를 마음을 가지고 귀담아듣는 것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