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중부 지역에 ‘긱산족’이라는 인디언 원주민 부족이 산다. 이들은 주로 자연산 송이버섯 등을 팔아 연명하는데, 버섯을 팔아도 제값을 챙기지 못했다. 중간 도매상들이 원주민들의 미숙함을 악용해 버섯의 매입 가격을 번번이 낮춘 탓이다.
10년 전쯤 이 마을에 김진수(64)씨가 들렀다. 교회 장로인 그는 선교 봉사 활동으로 현지를 찾았는데, 원주민 추장으로부터 “버섯 가격 폭락 좀 막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김씨는 미국에서 직원 500명 규모의 정보기술(IT) 기업을 18년간 이끌고 있던 사장이었고, 막 은퇴하려던 참이었다.
김씨는 고심 끝에 ‘긱섬’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원주민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원주민들이 채취한 송이버섯과 고사리 등을 적정 가격에 맞춰 팔아주면서 지금까지 그들의 자립을 돕고 있다. 하지만 이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삶의 의욕이 약한 원주민들을 위해 많이 기다려주고, 때로는 속아주고, 참아야 했다. 나중에 그의 아들은 아버지 김씨가 쓴 책 ‘선한 영향력’에 이런 편지를 남겼다. “저는 아빠가 원주민들을 상대하며 얼마나 인내심을 갖고 대하시는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아빠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원주민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선한 영향력이라는 용어가 요즘 곧잘 등장하고 있다. 이달 초에는 코로나19 여파로 40대 과일가게 주인이 임대료를 내기 힘들어지자, 점포 주인에게 “10만원이라도 깎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주인은 임차인에게 아예 생활비로 현금 100만원을 보내줬다는 사연이 SNS에 퍼졌다. 댓글에는 “아직 살만한 세상이다. 선한 영향력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한 대기업도 선한 영향력이라는 문구를 넣은 광고로 눈길을 끌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고 있는 크고 작은 ‘착한’ 실천들이 사회에 유익한 반작용을 일으킨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대중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이른바 ‘굿 인플루언서’들은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핵심 가치를 통해 영향력을 전파한다. 김씨의 경우 ‘노력이 덧셈이라면 정직은 곱셈’이라고 주창할 정도로 정직함을 최우선 가치로 여겼다. 임차인에게 선뜻 생활비를 건넨 과일 점포 임대인에게선 상대방 사정을 깊이 헤아리는 배려심이 엿보인다.
‘다양성 속의 하나 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미국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대통령 선거 한판에 세계 초대강국이 갈등과 대립, 반목과 조롱이 난무하는 나라로 손가락질당하고 있다. 지도자가 선한 영향력을 품고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추락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년간 편을 가르고, 낙인찍고, 협박하고, 무시하는 데 능했다. 피말린 접전 끝에 승리를 선언한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첫 메시지로 “반대자는 적이 아니다” “분열이 아닌 단합을 추구하겠다”며 통합과 치유를 강조한 것과 대조적이다.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도 내상이 깊다. 광기 어린 이념과 진영 논리가 SNS와 댓글을 도배하면서 온 나라를 양극단으로 내모는 것 같다. 이 와중에 본이 되고 따를 만한 어른이나 선한 영향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김씨는 긱산족의 ‘명예 원주민’이 됐다. 앞서 원주민 추장은 그에게 ‘빛나는 산(shining mountain)’이라는 인디언 이름도 하사했다고 한다. 그의 선한 영향력이 그를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것이다. 팍팍해진 이 땅 곳곳에도 ‘빛나는 산’들이 솟아나길 기대한다.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