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음대생·판사 출신이 쓴 드라마… 현장 냄새 팍팍!

입력 2020-11-09 04:02
현장 경험을 살린 전문직 작가가 만든 드라마들이 생동감을 무기로 시청자의 이목을 잡고 있다. 음대생 출신 류보리 작가가 집필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포스터. SBS 제공

“전부 경찰 브리핑 받아 그대로 쓴 거야. 기자가 현장에 가야지!”

SBS 새 금토극 ‘날아라 개천용’에 이런 대사가 나왔지만 어디서도 “작가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썼다”는 반응은 없다. 그만큼 현실적이어서다. 드라마를 쓴 작가가 양진호 비리 등을 고발한 독립매체 ‘셜록’의 수장 박상규 기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최근 기자, 판사, 음대생 등 경력을 살린 전문직 작가들이 방송가에 줄줄이 입성하면서 드라마에 생동감을 불어 넣고 있다. 땀에 찌든 티셔츠를 입고 껄렁껄렁 걸으며 괴짜 면모를 뽐내는 ‘날아라 개천용’의 자칭 특종 기자 박삼수(배성우)를 보며 “저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는 아마 없을 거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속 주인공 대부분은 실제 인물인데, 특히 드라마를 집필한 박 기자가 바로 박삼수의 실제 모델이다.

극 중 백수 기자의 실제 모델 박상규 기자가 쓴 ‘날아라 개천용’ 중 한 장면. SBS 제공

‘날아라 개천용’은 박 기자의 저서 ‘지연된 정의’를 바탕으로 창작됐다. 고졸 출신 박준영 변호사와 재심 사건을 파헤치며 정리한 기록물로 약촌 오거리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3인조 사건, 무기수 김신혜 사건의 내용이 담겨있다.

박 기자는 ‘지연된 정의’를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는 제안에 직접 대본을 쓰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SNS에 “내가 직접 내 이야기를 드라마에 담는 게 어색했다”며 “어떤 게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 구분 없이 그냥 박삼수로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나는 드라마를 보지 않고, 써본 적도 없으니 곽정환 감독은 대단한 모험을 한 셈”이라며 “대본은 그동안 써온 글과 많이 달랐지만 곽 감독은 ‘본인 스타일대로 써보라’고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날아라 개천용’은 가난한 변호사와 비정규직 노동자 출신 기자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내 호평을 얻고 있다. 특히 박 변호사를 실제 모델로 한 박태용(권상우)과 박삼수의 인연이 시작되는 장면은 직접 겪어야만 묘사할 수 있는 ‘궁상맞음’이 진하게 묻어난다. 박태용이 “육해공 중 무엇을 좋아하냐”고 묻자 박삼수는 “해”라고 답한다. 박삼수는 활어회를 기대하지만, 돈이 없는 박태용은 허름한 사무실에서 말린 오징어와 고등어 구이 등 조촐한 음식을 대접한다.

박 기자에게 대본을 맡긴 곽 감독은 앞서 2018년 법정 드라마 JTBC ‘미스 함무라비’를 만든 인물이다. 당시에도 부장판사 출신 문유석 작가와 손을 잡았다. 실제 법정에서 판결을 내려온 문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날카로운 시선들이 극의 묘미를 부각했다.

지난달 종영한 SBS 월화극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류보리 신예 작가를 중심에 세웠다. 클래식을 전공하는 음대생들의 꿈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는데, 화려한 듯 보이지만 현실은 불투명한 진로에 고뇌하는 음대생의 현실적인 고민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겪어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속내를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던 이유는 류 작가가 음대생 출신이어서다. 그는 서울대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마케팅부에서 근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앞서 산업의학 전문의 출신 송윤희 작가의 ‘닥터 탐정’, 교사 출신 박주연 작가의 ‘블랙독’, 육아전문지 기자 출신 노선재 작가의 ‘오 마이 베이비’, 검사 출신 김웅 작가의 ‘검사내전’ 등도 현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디테일을 무기로 흥행에 성공했다.

지금의 드라마는 단순 로맨스에서 벗어나 추리, 스릴러, 판타지 등 장르물로 진화하고 있다. 시청자의 요구가 다양해지자 작가들은 취재를 통해 작품에 현실을 반영해왔지만 여전히 현실과 간극이 존재했다. 전·현직자가 직접 녹여낸 땀 냄새가 지금 시청자의 취향을 관통하는 이유다.

기존 미디어가 다져놓은 선입견을 해소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드라마가 부정한 법조인, 악덕 기자, 수동적인 간호사 등 여러 직업군상을 평면적이고 피상적으로 묘사하는데 머물렀다. 하지만 현장을 겪은 작가의 입을 통해 현실을 전해 듣는다면 공감 폭이 넓어질 수 있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예전에는 심리 변화 위주의 드라마가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디테일이 중요해졌다”며 “차별화된 경쟁력을 지닌 신예 작가는 시청자가 몰랐던 뒷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