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독서 공동체로서 책의 존재에 대한 고민

입력 2020-11-05 21:36 수정 2021-11-04 16:59
‘책, 이게 뭐라고’는 읽고 쓰는 세계에 있던 저자가 팟캐스트를 통해 말하고 듣는 세계로 들어가면서 겪었던 소회를 풀어낸 책이다. 이는 홀로 일하던 세계에서 타인과 함께 일하는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면서 일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게티이미지 뱅크

일 잘하는 선배가 필요하다. 이런 생각은 시간이 가면서 이렇게 바뀌고 있다. 일 잘하는 선배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 잘하는 선배가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광고인 박웅현과 디자이너 오영식의 대화를 묶은 책 ‘일하는 사람의 생각’은 일 잘하는 선배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엿보기에 좋다.

현직에 있는 사람들의 ‘말’로 ‘일’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래서 더욱 어렵다. 대부분의 일은 말처럼 쉽지 않고, 대화하듯 흐르지 않는다. ‘일’은 ‘말’이 아닌 ‘일’로서 육박해 온다. 서류와 보고, 마감과 정산, 성과와 공유, 성장과 안정…. 그런 것들을 모두 아우른 채로 삶의 절반 가까이를 보낼 수 있을는지 쉽게 답할 수 없다. 그것도 이럭저럭 해내는 게 아닌, 잘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크리에이티브’한 분야일수록 선배의 경험은 과소평가되기 십상이다. 30년 넘는 경력이 쌓였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의 과업은 경험 이외의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경험하지 못한 세상, 이른바 뉴노멀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경험치를 가중한다. 우리는 어쩌면 지난 30년의 경험보다 가까운 1년의 경험이 더 중요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같은 이유로 이 책의 힌트는 일하는 사람에게 있어 매우 유용하다. 그것은 일종의 태도이다. 더 좋은 광고를 만드는 법은 따로 나오지 않는다. 더 나은 디자인을 이끄는 요령 또한 책에는 없다, 나아가 팬데믹 시대를 헤쳐 나갈 특별한 혜안이나 기후위기를 타개할 그들만의 방법 같은 게 있을 리도 만무하다. 다만 선배 둘은 말하는 것이다. 태도를 유지하자고. 멀리 보는 태도, 꾸준한 태도, 자존심을 지키는 태도, 진정성 있는 태도, 배우는 태도…. 그런 태도로 클라이언트를 대하고 팀워크를 다지며 새로운 것을 창작한다. 그것들로부터 나아간다. 그 나아감이 곧 ‘일함’이다.


“책으로 OO을 배웠다”라는 말이 긍정적 의미로 쓰이지 않는 요즘이지만 여전히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책에서 많이 배우려고 애쓴다. 책을 만들고 책을 읽고 책으로 배운다니…. 시대에 뒤떨어진 기성세대의 둔탁함 같은 것으로 내비칠까 봐 두렵지만 어쩔 수 없다. 책은 스스로의 물성을 변화시켜가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장강명의 신작 산문집 ‘책, 이게 뭐라고’를 들춰 보는 일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작가는 소설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책 소개 팟캐스트의 진행을 맡으며 느낀 소회를 담백하고 솜씨 좋은 문장으로 풀어놓는다. 쓰는 자아와 읽는 자아, 거기에 방송하는 자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몫으로 몰아넣기에는 얼핏 많아 보이는 ‘일’들이, ‘책’이라는 플랫폼 위에 정돈된다. 그러니까 ‘책, 이게 뭐라고’는 책에 대한 책이면서 일에 대한 기록이기도 한 셈이다. 작가는 읽고 쓰는 일을 직업 삼아, 최대한 잘해 보고자 하는 사람이지만, 말하고 듣는 세계는 그와는 사뭇 달랐다. 책을 소개하는 일도 결국 책의 일인데, 읽고 쓰는 일이 전부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일, 더구나 타인과 함께하는 일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면 양상이 달라진다. 그리하여 책은 나만 좋으면 되는 게 아닌, 독서 공동체로서 책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나아가게 된다. 동시에 소설가로서의 실제적, 존재론적 고민과 질문은 계속된다. 그것이 모두 작가인 그의 일인 것이다. 또한 동시에 출판편집자인 나의 일이기도 함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일 잘하는 선배는 많았다. 나는 거기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어느새 선배가 되어 버렸다. 일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도리어 일의 진행을 가로막는 일이 잦다. 사람이나 숫자나 내 생각만큼 따라와 주지 않고, 책은 책대로 원고는 원고대로 마음만 급해 여기저기 균열과 구멍이 생기기 일쑤다. 책, 이게 뭐라고 높은 파티션 속 좁은 책상에 앉아 애걸복걸하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광고인에게는 광고가 디자이너에게는 디자이너가 그의 생계이듯 장강명 작가와 나에게는 책이 우리의 생계일 따름인데, 그 생계를 이어감에 달라붙은 가치와 상징, 위기와 냉소가 희미하게 복잡하다. ‘책, 이게 뭐라고’는 적어도 거기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심지어 희미함을 붙잡고 복잡함을 갈무리해주기도 한다. 그래, 앞서 배운 태도를 토대로 지금 앞에 있는 일을 먼저, 그 뒤에 일은 그 뒤에 해나가야지. ‘책, 이게 뭐라고 못할 일도 아니지 않겠는가’하는 용기를 두 책에서 얻을 수 있었다.

서효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