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미술] 水面 위에 누운 ‘노출콘크리트 접시’… 세상에 없던 공공미술

입력 2020-11-05 04:03
“중랑구에선 승천하는 용을 세우지 않을까 했대요.”

빤한 건 미술이 아니다. 새로워야 미술이니까. 서울시가 공공미술 시민 아이디어 구현 프로젝트 1호 사업을 시행하면서 중랑구의 용마폭포공원을 대상지로 선정했을 때였다. 공공미술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한 사업이었는데 주민들 사이에선 이런 빤한 얘기가 돌았다. 절벽 사이 인공으로 조성된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가두는 수조에 설치하는 것이라 ‘쌍팔년도’식 조형물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2019년 10월 개장식 때 눈앞에 펼쳐진 이 공공미술 작품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노출 콘크리트로 만든 가로 30m 타원에 올챙이 꼬리 같은 길이 달려 사람들은 폭포가 만든 수면 한가운데로 산책하듯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수사 드라마에서 딴 것 같은 ‘타원본부’라는 그럴싸한 제목이 붙여진 이 작품에 서울시도, 중랑구청도, 시민들도 모두 흡족해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중랑구 용마폭포공원을 찾은 시민들이 폭포에 설치된 미술작품인 ‘타원본부’로 걸어 들어가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구경하고 있다. 폭포로 변신하기 전 채석장의 ‘동굴’을 본부 삼아 뛰어다녔던 옛 주민 이원복씨의 스토리를 정지현 작가가 작품으로 구현했다. 움푹 파인 동굴을 완만하게 펼쳐 어른이 된 우리 모두의 본부로 재탄생시켰다.폭포는 이날 특별가동됐다.최현규 기자

채석장 인공폭포, 중랑구의 ‘허파’가 됐지만

가을 단풍이 절정인 지난주 이곳을 찾았다. 기암절벽 위로 솟은 나무가 울긋불긋 물들어 설악산이 따로 없었다. 이 웅장한 절벽이 과거 채석장의 흔적이라니 상전벽해였다. 서울의 가난했던 동네 면목동에서 용도폐기됐던 채석장이 우리나라 공공미술 역사에 기록될 공공미술 작품을 품고 있는 현실은 한 편의 드라마같이 느꺼웠다.

채석장으로 쓰던 시절의 용마산 모습. 중랑구 제공

중랑구 면목동에 있는 용마산(해발 348m)은 아차산의 최고봉이다. 돌산이라 개발경제 시대인 1961년부터 88년까지 서울시의 골재 채취장으로 이용됐다.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인한 굉음, 뿜어내는 돌가루, 매캐한 매연이 이 동네를 상징하다시피 했다.

소임을 다한 채석장을 서울시가 공원으로 조성한 것은 91년이다. 역발상으로 97년에는 불도저가 파헤친 흉한 돌산을 절벽 삼아 인공폭포까지 만들었다. 구룡폭포처럼 길게 내려오는 수직의 2단 폭포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나이아가라처럼 옆으로 퍼진 폭포를 포진시켰다. ‘3개 1세트짜리’인 이 폭포에는 동양 최대의 인공폭포라는 자랑이 따랐다. 이곳은 이렇다 할 녹지가 없는 중랑구의 허파이자 주민들의 쉼터, 각종 행사가 치러지는 무대였다. 폭포를 배경으로 뛰어노는 동네 유치원생들의 해맑은 표정을 담은 과거 홍보 사진은 그걸 잘 말해줬다.

딱 거기까지였다. 장관을 이루는 폭포는 철제 울타리 너머 멀리서 구경해야 하는 대상에 그쳤다. 수영장 락스 냄새가 자동 연상되는 수조 바닥의 하늘색도 드라마 ‘응답하라 1997’ 분위기를 강하게 풍겼다. 중랑구가 서울시 프로젝트에 응모한 것은 뭔지 모르게 미진한 이곳을 환골탈태하고 싶은 욕구가 자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33세 작가가 1호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겨우 서른셋이래.”

용마폭포공원의 공공미술 당선자가 신진인 정지현(34) 작가라는 게 알려졌을 때 공공미술 시장에선 하나의 사건으로 회자됐다. 공공미술의 큰 축을 이루는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1만㎡ 이상 신·증축 건물에 미술작품 설치 의무화)의 수혜자는 이른바 공공미술 ‘꾼’들이었다. 전국에 비슷비슷한 작품이 난립하고 있지 않나. 같은 작가의 자기 복제 같은 작품이 서울에서 지방 소도시까지 곳곳에 있다. 독일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던 캐스퍼 쾨니히는 “(공공미술) 작품은 단순히 공간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창조해야 한다. 더 넓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정 작가는 어떻게 진입장벽을 뚫고 새로운 공공미술을 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공은 서울시에 돌려야 할 거 같다. 서울시는 빤한 공공미술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2018년 이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행정부의 재정 단위가 1년이라는 제약을 뛰어넘어 이례적으로 2년에 걸쳐 사업이 진행됐다.

1단계로 산하 구청을 상대로 대상지를 공모했다. 옥수역 고가하부광장(성동구), 서울 어린이대공원(광진구), 용마폭포공원(중랑구)이 최종 3배수 후보에 올랐다. 시는 2단계로 후보지를 대상으로 시민 스토리를 공모한 뒤 스토리 선정작을 작품으로 구현할 작가를 뽑았다. 작가 선정 과정에서 3명의 큐레이터가 참여해 이들이 각각 작가를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큐레이터-작가 러닝메이트 형식이었다.

최종으로 중랑구가 뽑혔는데 전문가 심사뿐 아니라 시민투표까지 거친 결과였다. 그렇게 탄생한 용마폭포공원의 ‘타원본부’는 스토리 공모 당선자인 면목동 옛 주민 이원복씨, 큐레이터 이단지씨, 정 작가의 삼박자가 빚어낸 결과물인 셈이다.

골재 채취가 끝물일 때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이원복씨는 또래 친구 12명과 ‘태극 13단’을 결성해 채석장 위 용마산 험한 바윗길을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녔었다. 채석장 입구에 파인 동굴을 ‘본부’라고 부르곤 ‘나쁜 사람들을 물리쳐 면목동과 중랑구, 그리고 나아가서 서울시와 우리나라를 좀 더 깨끗하고 멋진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을 품고서 말이다. 그는 이제 이곳이 대한민국의 문화본부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고 썼다.

옛 주민의 추억이 어린 곳에 정 작가는 ‘타원본부’를 내놓았다. 뽐내듯 위로 치솟지 않았다. 절벽과 폭포의 장관을 가리지 않도록 수면 위에 조용히 누운 노출 콘크리트 작품은 내부로 갈수록 옴폭해져 얕게 물을 담을 수 있다. “애들이 오면 ‘접시 물’에 들어가 첨벙첨벙 뛰어놀아요.” 공원에서 일하는 환경미화원 아주머니가 말했다. 폭포의 물보라에 옷이 젖어도 기분 좋아지는 공간이다. 어느새 타원은 ‘접시’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작품은 이원복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으로 움푹 파인 동굴을 완만하게 펼쳐 어른이 된 우리 모두를 위한 본부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정 작가는 “작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우리만의 기지, 시민들을 안아주는 것 같은 형태의 구조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타원의 표면에 직선과 곡선의 추상화 패턴이 있다. 작가가 제안해 지난해 7월 진행한 ‘시민들과 함께 그리는 물결 드로잉 워크숍’에서 아이들이 그린 물결 모양을 확대해서 새겨 넣은 것이다.

애써 만들고도 1년에 8개월은 접근 금지

타원본부를 제작한 정지현 작가. 최현규 기자

정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했다. 개인전 4, 5회 정도의 신인이었다. 그런 신진 작가를 이단지 큐레이터가 추천한 이유는 뭘까. 정 작가의 작품세계의 한 축에 거리 조형물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집약해서 보여준 전시가 2019년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가진 개인전 ‘다목적 헨리’다. 헨리는 미술 교과서에도 나오는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를 뜻한다. 장소의 맥락과 상관없이 헨리 무어의 작품과 비슷해 보이는 추상 조각들이 거리의 조형물로 널려 있는 현실에 대한 풍자다.

서울시도 비슷한 반성에서 이 사업을 출발했다. 서울시 디자인정책과 김백곤 학예연구사는 “시민 참여를 내걸어도 피상적 참여에 그치는 공공미술이 대부분이었다. 시민이 잠깐 체험하는 걸 참여라고 한다. 정말 시민이 중심이 되고 시민의 목소리를 듣는 공공미술을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고 사업 배경을 설명했다. 영국에서 2005∼2009년 4년에 걸쳐 전국에서 진행했던 ‘빅아트 프로젝트’가 모델이 됐다.

문제는 이렇게 혁신적인 시도로 탄생한 ‘타원본부’에 연중 5∼8월 4개월만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폭포를 이 시기에만 가동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8개월 동안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울타리 밖에서 관망하는 대상에 그친다. 정 작가는 말했다.

“굳이 폭포를 가동하지 않더라도, 수조에 물을 채우지 않더라도 ‘타원본부’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어요. 타원 위에서 무용 퍼포먼스나 마임, 연극 등이 충분히 가능하지요. 사람의 행위가 들어감으로서 완성되는 작품이거든요.”

볕 좋은 가을, 타원본부에서 펼쳐지는 거리의 무용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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