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남의 나라 대통령 선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로 한 후보의 허물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자기는 그 후보를 찍을 거라고 말했다. 실제로 투표권을 가지고 있기도 한 사람이라 이유가 궁금했다. 그 역시 그 후보의 약점과 허물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지하는 까닭은 자기가 그 후보와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이유는 제시하지 않았다.
물론 누구든 지지할 수 있다. 누가 누구를 어떤 이유로 지지하든 자유다. 어떤 사안이나 사람에 대해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하고, 또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를 수 있으니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일화는 나에게 몇 가지 생각거리를 제공했다.
우선 기준이 적용되는 범주에 대해 생각해보자. 문학작품을 심사하다 보면 심사위원들끼리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가 있다. 만장일치로 수상 작품을 뽑기도 하지만 대개 열띤 토론을 거쳐 투표로 결정한다. 그 과정에서 얼굴을 붉히는 일도 일어난다. 평가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문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기준을 가지고 심사하러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문학적 성취에 대한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문학적 성취와 상관없는 엉뚱한 기준이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자리에 끼어들어올 수는 없다. 가령 누구도 어떤 소설에 노인이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거나 노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형편없는 작품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런 기준은 엉터리다.
두 번째로 생각해볼 만한 것은 여러 요소가 두루 고려돼야 하는 종합적 사안에 극히 제한적인 한 가지 기준만을 적용해 판단하는 일의 부당함이다.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를 정치인 평가 기준으로 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유일한 기준이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더 중요한 다른 요소들을 무시하고 그것만을 선택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다면 그것은 정치를 단순화의 방식으로 왜곡한 것이 된다.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대부분의 일들이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다양한 층위에서 심사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여러 요소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얽혀 있는 것이 삶이다. 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것도 간단하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일화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한 문제는 그의 유일한 기준이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기준은 특정 종교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이다. 그가 가진 유일한 기준은 자기 자신이다. 그는 그 후보가 특정 종교 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종교의 신자이기 때문에 선택한다. ‘나와 같은’ 사람인가가 기준이라면, 이 기준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구를 선택하든 이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선택하는 것을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주변에 그런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마치 가창력이 기준이어야 하는 가수를 평가하면서 자기와 같은 지역 출신인지, 종교가 같은지, 지지 정당이 같은지를 기준으로 삼는 것 같은 코미디를 너무 자주 본다. 내 편인가, 아닌가 라는 단 하나밖에 없는 기준을 모든 경우와 사람에게, 무작위로 무리하게 적용해 판단하는 사회를 제대로 가고 있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판단과 선택을 위해 기준을 갖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진 기준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가진 기준은 합당한가. 내가 가진 기준이 ‘나’일 뿐이어서 나와 종교가 같은 사람, 출신 지역이 같은 사람, 지지 정당이 같은 사람만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나와 같은’ 사람은 어떤 허물도 보지 않고,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은 어떤 좋은 점도 보지 않는 청맹과니가 돼 있는 것은 아닌가.
이승우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