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시대다] ‘미완의 날’ 함께 했던 학생과 선생님들의 이야기

입력 2020-11-07 04:02
KBS 드라마 ‘학교’(1999)는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청소년 드라마다. 이전 청소년물은 계몽적 성격이 강했지만 이 작품은 억지로 교훈을 끌어내지 않아 호평 받았다. 이후 시리즈를 거듭하며 신인 등용문으로도 주목받았다. ‘학교’ 중 한 장면. KBS 제공

참고서 단체 구매에 반대하는 아이들이 대자보를 붙인 날, 교내 방송에서는 고상한 클래식 음악 대신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가 울려 퍼졌다.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노래를 따라 부르던 아이들의 얼굴엔 해방감마저 보였다. 방송반이 주도한 이 반란에 아이들은 열광했고 선생님들은 당황했다. 대학에 가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공부만 하라지만 대학에선 취직을 위한 스펙 경쟁에 매달려야 하고, 취직 후엔 승진을 위한 관계에 집착해야 하는 것이 현실임을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세상은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참을성 없는 누군가가 먼저 강물에 뛰어들어 굶주린 악어의 먹이가 되길 기다리는 곳이 아닌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학교는 왜 함께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을까? KBS 드라마 ‘학교’(1999)는 교육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대화의 장으로 불러오겠다는 기획 의도로 만들어진 청소년 드라마다.

이해와 소통으로 성장했던 학생과 선생님

청소년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제3교실’(MBC·1975)이다. 학생들의 상담기록과 수기집을 근간으로 고등학생뿐 만 아니라 재수생, 근로 청소년들까지 십대들의 문제를 폭넓게 파헤치며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다. 이후 ‘고교생일기’(KBS·1985), ‘푸른교실’(MBC·1987>, ‘공룡선생’(SBS·1993), ‘사춘기’(MBC·1993), ‘신세대 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KBS·1995), ‘나’(MBC·1996) 등이 청소년들의 고민과 갈등, 꿈과 희망을 그리며 청소년 드라마의 맥을 이어갔다. 방송은 청소년들의 삶을 통해 이 사회의 내일을 희망적으로 만들어 가는데 기여하고자 했다.

그래서 청소년 드라마는 교육적 목적을 앞세운 계몽적 성격이 강했는데 ‘학교’는 좀 달랐다. 직접 거론하기 껄끄러운 이야기들을 에둘러 보여주거나 교훈적인 방법으로 결론을 이끌어내려 하지 않았다. 잘 될 것이라는 과도한 희망도 심어주지 않았다. 당시 기사에 의하면 김지우 작가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학교의 현실을 담아내기 위해 고교생 200여명을 면담했고, 현직 교사뿐 만 아니라 PC 통신을 통해 생생한 현장 자료들을 취합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은 현실감 있는 에피소드와 탄탄한 구성으로 극의 사실성을 살려냈고 메시지에 대한 공감력을 높여주었다.

‘학교’는 동광고등학교 2학년 3반의 이야기다. 아이들의 일상은 평범했지만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을 학교는 따라가지 못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만큼 부딪침은 잦았다. 감정이 앞선 선생님들은 매를 들기도 했지만 체벌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을 뿐이었다. 학교 폭력 문제는 근본적인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일진이라 불리는 아이들은 무조건적인 복종과 불복에 대한 응징으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친구의 약점을 잡아 괴롭히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누명을 씌우기도 했다. 가정생활이 안정적이지 못한 아이들 중에는 학교에서도 겉도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을 반겨주는 곳은 해 저문 거리의 유흥업소였고 임신과 낙태엔 무방비였다. 어른들은 흔들리는 이 아이들을 문제아라 불렀다. 그들의 꿈이 무엇인지, 왜 삐뚤어진 길을 가고 있는지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모범생이라 불리는 아이들도 흔들리긴 마찬가지였다. 1등을 지키기 위해 잠시도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오로지 내신 등급을 높이기 위해 전학을 갔고 성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해 ‘성적 좌절 증후군’이라는 묘한 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부모의 기대는 응원의 찬가이기도 했지만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아이는 선생님 컴퓨터에서 시험 문제를 훔쳤다.

선생님 역할의 이창훈과 염정아, KBS 제공

‘학교’는 선생님들의 고민도 빼놓지 않았다. 과도한 수업량과 불필요한 행정업무는 아이들과 소통하고 이해하는 시간을 줄여야 했다. 선생님들조차도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학생들에게 지시해야 할 때도 있었다. 체벌 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기도 하고 내 자식 사랑이 앞선 학부모들에게 교무실에서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 ‘학교’는 선생님들에게도 고민의 시선을 부여하며 교사로서의 사명감과 생활인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어떤 선생님이 되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신구 세대의 시각차나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로 해석하며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인 전교조 이야기를 드라마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매회 다양한 문제들을 수면으로 끌어올린 ‘학교’의 해법은 기다림이었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서로 반성하며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이 다소는 인위적이기도 했지만 ‘학교’는 아이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자생력을 키워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고 그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선생님들 또한 아이들의 든든한 길잡이가 되기 위해 어른다운 모습으로 거듭나고자 노력했다.

신인 등용문, 시즌제 드라마 문 열다

‘학교’는 별도의 주인공이 없었다. 보통은 인지도 있는 배우들을 통해 시청률을 견인하려 하지만 ‘학교’는 낯설었던 신인들을 대거 등장시키며 청소년 드라마다운 신선함을 보여주었다.

매사에 적극적인 이민재(최강희), 한때 일진 짱이었던 강우혁(장혁), 정의롭고 긍정적인 김건(안재모)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긴 했지만 전교 1등 채정아(박시은), 명랑 쾌활한 오락부장이자 괴짜 조석호(양동근), 외모에 관심 많은 박나리(김민선), 내신 때문에 전학 온 김승희(이재은), 방과 후 클럽을 드나드는 배두나(배두나) 등이 각자의 캐릭터에 맞춰 다양한 에피소드를 이끌어 갔다. 이후 이들은 연기력 있는 배우가 되어 ‘학교’에게 ‘신인 등용문’이라는 영광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어진 시즌에서도 김래원, 김흥수, 하지원, 김민희, 조인성, 이동욱, 임수정, 이유리, 공유, 이종석, 김우빈 등 많은 배우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성장해갔으니 ‘학교’는 말 그대로 배우들의 학교이기도 했다.

‘학교’로 스타덤에 오른 배두나. KBS 제공

한편 선생님으로 등장한 선배 배우들은 신인 배우들에겐 더없이 좋은 연기 선생님이었다. 정년을 앞둔 평교사로 지혜로운 중재자 역을 했던 신문수 선생님역의 신구를 비롯하여 감미로운 로맨티스트에서 양철통이란 별명을 가진 독사 학생주임으로 연기 변신을 했던 강석우, 교사로서의 사명감보다 현실적 입장을 중시했던 교감 명계남, 좌충우돌하며 선생님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아가던 신임 교사 이창훈, 교육현장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의견을 끊임없이 피력했던 염정아 등은 제작 현장에서 세심한 연기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고 하니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선생님은 선생님이었다.

‘학교’는 국내 드라마 최초의 시즌제 드라마이기도 하다. 시즌별 방송 시기와 방송 횟수 등을 볼 때 외형적 규칙성은 갖추고 있지 않지만 시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형식은 동일했다. 시즌제는 기획 단계부터 시즌 전체에 대한 구상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한국형 시즌제 드라마는 ‘전작 성공 후 시즌화’라는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학교’도 처음부터 시즌제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등장인물들이 한 학년을 마칠 때마다 학교는 자연스럽게 시즌 2, 3, 4로 거듭났다. 시즌4가 종영되고 10년 후 ‘학교 2013’, ‘후아유 학교 2015’, ‘학교 2017’이 이어졌지만 시즌5부터는 학생 자체에만 집중했던 이전과 달리 기간제 교사나 특정 주인공의 스토리에 집중하면서 지향점을 달리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뒤 돌아보면 ‘학교’에 담겼던 이야기들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내 폭력, 가출, 시험문제 유출, 성추행, 체벌, 학생들의 유흥업소 출입 등 지금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오히려 학교는 더 혼란스러워졌고 미완의 날들을 함께 할 학생과 선생님 사이는 더 건조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욕망에 초점이 맞춰졌던 ‘SKY 캐슬’(jtbc)이나 돈을 벌기 위해 거침없이 범죄의 길에 들어섰던 ‘인간수업’(넷플릭스)과 비교해보면 동광고등학교 2학년 3반 아이들의 고민은 순해 보이지만 ‘학교’가 교육의 미래를 바꾸지는 못한 채 20세기의 유물로 남은 것 같아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