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간 교정선교를 해오면서 아내뿐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두 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간절하다. 자식들이 아빠를 잘 만나야 하는데, 나는 자식들보다 재소자들에게 더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아왔다.
딸들이 한창 예민한 10대 사춘기 소녀 시절, 갈 곳 없는 출소자들을 며칠씩이나 딸들 방에서 재워 보내곤 했다. 평범한 남자와도 한집에 같이 살기 힘들 텐데 감옥에서 출소한 재소자들을 자기들 방에 재우며 한 집에서 생활하게 했으니 그런 아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딸들은 자기네 방을 재소자들에게 내어준 채 부모와 함께 한방에서 자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출소자들을 ‘하나님 나라에선 제일 귀한 손님들’이라며 환한 웃음으로 반겼고, 우리 부부보다 먼저 “제일 좋은 이불을 꺼내주라”고 챙길 정도로 착한 아이들이었다.
성인이 된 두 딸은 공부하느라 안동과 대구에 각각 흩어져 살았다. 타지에서 고생하는 딸들에게 반찬 한 번 장만해서 갖다 주질 못했다. 뒷바라지에 소홀했던 우리에게 딸들은 불평 한 번 한 적 없었다.
내가 1991년 ‘제1회 바르게살기 국민대상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을 때도 딸들은 축하보다 “그러면 천국 가서 받을 상이 어디 있느냐”며 못마땅해 했다. 나보다 더 나은 신앙의 모습을 가진 딸들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어느 날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둘째 딸이 느닷없이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지만, 음악학원을 운영하는 딸의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대구로 향했다. 음악학원에 들어서자 남자친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몇 대의 피아노와 연습하는 학원생들이 보였다.
오후 3시쯤 됐을까. 옷을 초라하게 입은 초등학교 3·4학년 정도 돼 보이는 학생 4명이 들어섰다. 학원생 같아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실컷 놀던 아이들은 학원에서 나눠주는 빵과 우유를 갖고 돌아갔다.
강사 선생님께 물으니 “인근에 있는 보육원 아이들인데 학교를 마치면 마땅히 놀 데가 없어서 원장이 학원으로 불러 놀게 하고, 갈 때는 꼭 빵과 우유를 손에 들려준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베풀고 나누고 섬기는 것이 일상이 돼 있는 딸의 남자친구가 마음에 들어 결혼을 허락했다.
두 달 후, 청첩장을 갖고 온 딸이 “100장을 인쇄했는데, 50장은 아빠가 사용하시라”며 건넸다. 당시 교도소 사역이 분주해 주변 경조사를 챙기지 못한 형편이라 50장을 어디다 줘야 하나 고민하며 망연자실했다.
마침 그때 제1감호소에 근무하는 유승만 장로가 찾아와 “장로님,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딸 아이가 청첩장 50장을 줬는데, 교회는 광고만 하면 되고 쓸 데가 별로 없다”고 했다. 그는 “장로님 그 청첩장 내게 주세요”하고는 가지고 갔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