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다 발길질·고함 ‘병적 잠꼬대’… 치매·파킨슨병 경고등

입력 2020-11-02 20:22 수정 2020-11-02 20:23
게티이미지

최근 대학병원 수면클리닉을 찾은 60대 초반의 A씨. 그의 눈 주변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손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동행한 아내 말에 따르면 남편은 아주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는데 1년 전부터 가끔 잠자는 중에 소리를 지르고 천장을 향해서 헛손질하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고 했다. 깨어나서 간밤의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으면 꿈을 꾼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른다고 했다. 비슷한 증상이 점차 잦아지고 행동도 커져서 장롱을 주먹으로 쳐서 손을 다치거나 문짝이 망가지기도 했다. 전날 밤엔 잠자는 중에 소리를 지르면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 눈 주위에 커다란 멍이 생겼다고 한다.

A씨의 진단명은 ‘렘수면행동장애’라는 수면병. 잠을 자다가 자신의 움직임이나 고함소리에 놀라 깬 적이 있거나 주변 사람에게서 잠꼬대와 움직임이 심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면 A씨처럼 렘수면행동장애를 의심해야 봐야 한다.

2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렘수면행동장애로 진료받은 사람은 3만5345명이었다. 2015년(2만4799명)보다 42.5% 증가한 수치다. 40대 이상 중·장년층에서 주로 발생하고 나이가 많을수록 많이 겪는다. 인구 노령화와 스트레스, 알코올·카페인 등 물질 남용, 교통 발달로 인한 수면 주기 변화 등 복합적인 요인이 수면병 증가 추세와 관련 있는 걸로 추정되고 있다.

꿈꾸는 렘수면 이상 ‘건강 적신호’

하룻밤 잠은 비렘(non REM)수면과 렘(REM)수면 단계가 번갈아가며 4~5차례 반복돼야 정상이다. 잠들기 시작할 때부터 깊은 잠에 빠지기까지의 비렘 수면 단계에선 눈동자가 거의 움직이지 않고 뇌 활동이 느려진다.

렘수면은 흔히 ‘꿈을 꾸는’ 단계다. 이때 뇌는 낮에 공부하거나 기억했던 것을 기억 창고에 저장하는데, 이런 과정 중에 꿈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낮에 있었던 일들과 비슷하거나 연결되는 내용을 주로 꿈꾸게 되고 낮에 있었던 내용을 모티브로 과거 기억들을 동원해 새로운 꿈이나 엉뚱한 꿈, 그리고 왜곡된 꿈을 꾸기도 한다.

렘수면이 잘 이뤄져야 정보 기억은 물론 스트레스 완화, 성기능 유지 등이 정상 작동된다. 서울스페셜수면의원 한진규(신경과 전문의) 원장은 “렘수면이 없으면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걸리기 쉽고 성기능도 떨어진다”면서 “전체 수면시간 중 렘수면이 15~25%는 차지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렘수면행동장애도 이 단계에서 일어난다. 렘수면 단계에서는 비렘 단계와 달리 눈꺼풀 밑에서 안구가 빠르게 움직이고 뇌가 활발하게 활동한다. 단, 신체 움직임은 거의 없다. 렘수면 중에 있는 사람을 깨우면 대개 꿈 속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신체 근육의 힘을 조절하는 ‘뇌간(뇌교)’에 문제가 생기면 꿈의 내용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렘수면행동장애가 나타난다.

강동경희대병원 신경과 신원철 교수는 “꿈을 꾸는 렘수면 동안에 우리의 신체는 근육 긴장도가 소실돼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힘든 악몽에서 도망치거나 움직일 수 없으며 끙끙거리고 힘들어하다가 결국 중간에 잠에서 깨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렘수면기 동안에 근육 긴장도가 소실된 상태여야 하지만 깨어있을 때처럼 근육 긴장도가 유지되거나 높아져 꿈의 내용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인들이 자다가 고함을 지르고 일어나는 경우가 대표적 예다. 렘수면이 잠의 후반기, 새벽 4~5시경에 나타나기 때문에 렘수면행동장애도 주로 새벽에 겪는다. 1~2주에 한 번씩 혹은 매일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도 있는데,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거나 공격적 행동으로 자신이나 자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렘수면행동장애인 사람과 함께 자다 보면 얻어 맞는 경우도 생긴다.

웬만한 상처를 입어도 잠에서 쉽게 깨어나지 않지만 일단 깨어나면 자신이 한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몽유병이나 야경증과는 달리, 깨어 나서도 악몽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나 가족들도 이 수면병을 단순히 ‘험한 잠버릇’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기 십상이다.

15년 후 80%가 파킨슨병 진행

문제는 렘수면행동장애가 피킨슨병이나 치매의 전조 증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렘수면은 뇌간의 한 부위에서 만들어지는데, 뇌간이 손상되거나 이상이 발병하면 대뇌에서 내려가는 운동신경을 차단하지 못해 렘수면기에도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신 교수는 “최근 연구에 따르면 뇌간의 손상이 먼저 발생하고 그 바로 윗부분인 흑질로 점차 손상이 퍼져 나가기 때문에 렘수면행동장애가 파킨슨병 등 신경 퇴행성질환 발병에 앞서 나타나는 일종의 전조 증상, 즉 경고등이 된다”면서 “실제 램수면행동장애가 생기면 향후 5년 내 30%, 10년 후에는 50~60%, 15년 후에는 80%에서 파킨슨병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알코올이나 마약 등 약물, 카페인 중독에 의해서도 렘수면행동장애가 생길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항우울제는 렘수면을 억제하는 작용이 있는데, 이런 약물을 복용하다가 갑자기 줄이거나 끊게 되면 수면 중에 억제됐던 렘수면기가 반동 작용으로 평소보다 많이 나타나 렘수면행동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신 교수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누구나 소망하는 일이지만 잠자는 동안 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 특히 수면 중 폭력적 행동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렘수면행동장애가 심할수록 우울증이나 감정표현 불능증이 더 심해지는 등 정신건강 상태도 위협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김효재 교수팀은 최근 렘수면행동장애가 있을 경우 일반인 집단보다 우울증과 감정표현 불능증 유병률이 각 1.5배, 1.6배 높다는 연구결과를 수면과학 학술지(Sleep Medicine)에 발표했다.

잠을 자면서 발길질을 하거나 심한 잠꼬대를 한다면 렘수면행동장애를 의심하고 수면클리닉을 찾아야 한다. 특히 잠자면서 거친 욕을 하며 싸우거나 주먹을 휘두르고 심하게 움직이다 침대에서 떨어지기까지 한다면 렘수면행동장애가 의심되는 ‘병적 잠꼬대’에 해당된다. 수면다원 검사를 통해 일반 잠꼬대와 구분해야 한다.

한진규 원장은 “특히 50세 이상이면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이런 병적 잠꼬대 증상을 보인다면 치매나 파킨슨병으로 진행될 위험이 높은 만큼,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