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성 때문이죠.”
올해 부상한 많은 경제 문제들의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유동성’이다. 집값 상승, 증시 고공행진 배경에 정부의 대대적인 돈 풀기가 있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초저금리와 각종 자산 매입 등으로 시장에 현금을 수혈하고 있으며 정부도 역대 최대 규모의 예산을 쓰고 있다. 유동성은 현실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당장 은행에 가면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유동성이 자산 가격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맞는다. 사람들이 싼 이자로 돈을 빌려 부동산,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 국가가 계속 금리를 내리고 시장에 돈을 풀면서 전 세계 실질 주택 가격은 꾸준히 올랐다. 이미 2017년 글로벌 주택가격지수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며 미국, 영국 등의 집값이 치솟았다.
그렇다면 유동성을 거두면 될까.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유동성에 대해 “맞벌이 부부들에게 한 시간 동안 다른 부부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쿠폰을 발행해 준다고 가정해 보자. 구조적으로는 모두가 공평한 효율적 시스템이다. 그러나 곧 시장 실패 상황이 벌어진다. 당장 외출하지 않는 부부들은 최대한 쿠폰을 적립하려 하고, 쿠폰 회전율이 줄어들면서 그 가치는 점점 높아지고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외출을 더 꺼리게 된다. 소위 불경기가 발생한다. 이 경우 최선의 해결책은 쿠폰을 더 많이 발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다수 기업과 사람들이 소비와 투자를 꺼릴 때 더 많은 화폐 투입으로 이를 해결하는 것이 유동성이라는 얘기다. 전 세계에는 당분간 유동성을 멈출 수 없다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지난달 재정·통화 정책에 대해 “아직 갈 길이 멀다”며 “실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정책을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헛되이 낭비되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는 유동성을 갑자기 멈췄을 때의 충격을 기억하고 있다. 일본은 1990년대 자산 시장 과열을 잡기 위해 금리를 빠르게 올렸는데, 이것이 ‘잃어버린 20년’을 불러왔다는 분석이 많다. 미국도 1930년 대공황 때 재정 지출을 줄이는 순간 ‘제2 침체기’가 발생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도 한동안 이 기조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동성과 자산 가격 상승은 따로 구분해 바라봐야 한다.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시중에 돈을 뿌리는 것과 이것이 상품과 서비스에 쓰이지 않고 부동산, 주식 등에 몰리는 것은 별개로 접근해야 할 문제다. 유동성은 거시경제 차원에서 탈출 시점을 고민해야 한다. 자산 시장은 미시적인 차원에서 수요·공급, 늘어난 부채에 대한 연착륙 방안 등을 별도 구상해야 한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일부 정부 관계자들의 답변 때문이다. 최근 자산 시장 과열을 초저금리 탓으로만 돌리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유동성으로 인한 젊은이들의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이 안타깝다, 전세 불안도 저금리 탓이다 등의 얘기까지 한다. 너무 쉬운 대답이다. 자산 가격 상승 배경에 유동성이 있는 것은 맞지만 전적인 문제는 아니다. 두 사안을 동급으로 본 순간 시중에 풀린 돈이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들어간다고 기업·가계에 도움이 될 돈줄까지 막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답변한 그들도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정책 실패 등 더 큰 원인을 외면하는 회피성 대답이다.
유동성 시대는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다. 이것만 변명으로 삼기엔 우리가 돌파해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더 이상 둘러대지 말고 사안을 분리해 대응해야 한다.
전슬기 경제부 기자 sgj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