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일류 키운 이건희의 ‘선택과 집중’… 재계, 노하우 배운다

입력 2020-10-29 04:05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발인식이 엄수된 28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 삼성기가 조기로 게양돼 있다. 권현구 기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별세를 계기로 이 회장의 경영 노하우를 배우는 분위기가 재계로 확산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28일 내년 이 회장을 비롯해 한국 경제 발전을 이끈 1, 2세대 경영인에 대한 자료를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용근 경총 상근부회장은 “미래의 기업인들이 이전 경영인의 강점을 배워 기업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와 재계 인사들은 이 회장이 ‘선택과 집중’으로 뛰어난 위기 대응 능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한다. 이 회장은 IMF 외환위기 전인 1996년 사장단 회의에서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나니까 우리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자만에 빠졌다”며 비상경영을 선언했다. 이익을 내기 어려운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차세대 유망 사업에 역량을 집중했다.

삼성은 IMF 구조조정 과정에서 주력 업종을 전자, 금융, 무역·서비스로 압축하고 비주력 사업을 해외에 매각했다. 98년 한국휴렛팩커드, 중장비사업을 매각했고 이듬해엔 삼성GE의료기기, 발전설비사업을 팔았다. 2000년엔 이 회장이 큰 손실로 그룹에 부담을 줬던 삼성자동차를 르노에 매각했다. 이후에는 HTH 택배사업, 삼성플라자 등을 정리했다(그래픽 참조).


90년대는 위기 극복에 초점을 둔 매각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주력 산업 집중을 위해 비주력 사업을 매각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삼성은 외환위기 이후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 체질을 개선하고 빠른 시간 내에 흑자 전환을 실현했다.

4대 그룹 한 임원은 “70년대에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 등에 투자하고 위기에 대비해 사업을 정리한 걸 보면 이 회장은 지금도, 5년 뒤도 아닌 굉장히 앞선 세상을 보는 기업인이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 회장의 ‘인재 경영’도 탁월한 면모로 회자되고 있다. 삼성은 95년 국내 기업 최초로 학력이나 학벌을 평가에 반영하지 않는 ‘열린 채용’을 시작했다. 고졸자나 현장 직원에게 기회를 주지 않던 채용 관행을 철폐하고 능력과 열정만 있으면 모든 삼성 직원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근무했던 신세돈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기업이 학벌이나 지연을 위주로 채용을 많이 했는데 이 회장은 그런 데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며 “내가 삼성에 있을 때 사내에서 고교나 대학 동창회를 하면 그날로 파면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런 인재상 덕분에 한국 IT업계에 주축이 된 김범수 카카오 의장,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도 삼성에 몸을 담을 수 있었다. 이 회장의 경영 철학을 배우려는 이들이 급증하면서 절판된 그의 유일한 저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출고가 6500원)는 2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무노조 경영, 편법 승계, 정경 유착 등에 대해서는 기업인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강주화 권민지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