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 축약판’ 팔복 누리려면 하나님 자리서 내려와 자녀돼야

입력 2020-10-30 03:06
일러스트=박예림

신약을 볼 때마다 이해는 한 것 같은데 마음에선 왠지 텅 빈 느낌이 있었다. 기독교 서점을 찾아 그 공간을 채워보려 애썼다. 신약성경으로 예수님을 설교하면서도 설교 내용이 매우 율법적이었다. “기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내 말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이것이 나의 실체였다. 그래서 설교 속에는 항상 추상적인 공허함이 맴돌았다.

나는 이러한 목회에 지쳐가고 있었다. 목표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다 모세오경을 깨달은 순간, 목회가 신이 나고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신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팔복은 모세오경을 축약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팔복은 신앙의 노정이요 구원의 과정이기 때문에 크리스천의 골수까지 들어가도록 훈련해야 한다. 파주 순복음삼마교회는 팔복을 반복·단순·지속적으로 훈련하며 성도들은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팔복은 여덟 가지가 단계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 단계는 반드시 차례대로 올라가야 하는 사닥다리와 같이 돼 있다.

첫째 단계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다. 팔복에서 천국은 두 번 나온다. 처음에 나오는 천국은 심령천국을 말하고, 마지막에 나오는 천국은 영원한 천국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한마디로 가치의 변화다. 마음에 세상이 가득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돌짝밭과 가시밭, 길가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옥토’는 어떤 땅인가. ‘깨닫는 마음’이란 뜻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의 뜻은 예수님을 알고 나서 깨달아 가치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려고”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때 가난은 심령의 가난을 의미한다. 더이상 세상에 가치를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천국은 바로 그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애통하는 자의 복’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가치의 변화가 일어나니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 애통하는 것이다. 애통 중에서 가장 큰 애통은 내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서 살았던 것을 애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창세기 3장 5절에 나온다. “선악과를 따먹어라. 너 하나님처럼 살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에 아담이 속은 것처럼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똑같이 속고 있다. 인간은 명예가 있으면 명예로, 돈이 있으면 돈으로, 힘과 권세가 있으면 그것으로, 건강과 미모가 있으면 그것으로, 심지어 일부 목회자는 목회가 잘 되면 그것으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간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죄를 애통하라는 것이다. 애통하는 것은 하나님 자녀로 살아야 하는 본분을 잊고 하나님처럼 살았던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자에게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위로자는 오직 보혜사 성령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친구, 부모, 쾌락, 돈, 예배당의 크기가 위로해주지 않는다. 오직 보혜사 성령님만이 위로자가 돼 주신다. 우리가 애통해할 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이렇게 위로해 주신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네가 연약해서 그렇지, 힘들지. 네가 그렇게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니. 이젠 괜찮아.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도와줄게. 같이 가줄게. 함께 걸어가자.”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는다고 하신 것이다.

셋째 단계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국어사전에서 온유의 뜻은 이렇다. ‘마음이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으며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 우리는 유교적 가치로 학습돼 온유라는 단어를 그렇게 쓰고 있다. 온유의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온 사람을 뜻한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 자리에서 내려와 100% 하나님이 행하실 것을 믿고 기다린다. 기다리면서도 환경이나 주변 사건에 대해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다. 힘들지도 않고 불쾌하지 않은 평안한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평안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에 근거를 둔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이 말씀을 유교적 해석으로 온유한 사람에게 땅을 많이 줄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무서운 기복신앙에 빠진다. 이 세상에 처음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이 누구였던가. 아담뿐이었다.(창 1:26~28) 그런데 왜 그는 땅을 잃어버렸을까. 바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자리에 올라간 뒤 땅을 상실했고, 가는 곳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났다. 모두가 대적자가 됐다.

그래서 우리는 온유한 자, 즉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자녀가 돼야 한다. 그래야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다. 그러면 신명기 28장에 약속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성읍에 가면 성읍이 복을 받고 들에 가면 들이 복을 받는 놀라운 다스림의 복이 임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아담에게 주셨던 세 가지의 축복을 다시 우리에게 회복해 준다고 하신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복이다. 둘째,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한 복을 받는 것이다. 셋째,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이다.

이일성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모세오경 아카데미]
▶①
▶③
▶④
▶⑤
▶⑥
▶⑦
▶⑧
▶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