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 중에서 흔치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각오하고 만들었습니다.”
일본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65)는 일본군 생체실험을 소재로 한 자신의 영화 ‘스파이의 아내’를 두고 이런 소감을 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초청 상영을 기념해 26일 열린 온라인 기자간담회 자리에서였다. “‘스파이의 아내’가 일본 과거사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목소리인가”라는 질문에 구로사와 감독은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는 아니다. 시대와 결합한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면서도 “양심적 목소리로 받아들인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다. 당시를 성실하게 그리고자 했다”고 답했다.
구로사와 감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함께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꼽힌다. 도쿄의 기이한 연쇄살인을 다룬 ‘큐어’(1997)로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올랐다. 이날 간담회는 감독을 향한 뜨거운 열기로 예정된 1시간에서 30분가량 더 진행됐다.
지난 6월 일본 NHK 방송에서 8K 화질로 방송한 스페셜 드라마를 영화화한 ‘스파이의 아내’는 지난달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거머쥐었다. 특히 일본 거장이 그린 일제의 만행으로 큰 관심을 모았었다. 태평양전쟁 직전 무역상 유사쿠는 사업차 간 만주에서 우연히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목격하고 참상을 세상에 알리고자 고군분투한다. 위험한 일이라며 망설이던 아내 사토코는 결국 남편과 뜻을 같이하고 ‘스파이의 아내’가 된다.
이 영화는 현대 일본 사회에 주목해온 구로사와 감독이 처음 선보이는 시대극이다. 시비(是非)를 판단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그는 “현재진행형이어서 옳고 그름을 논하기 어려운 현대와 달리 과거를 무대로 하면 확신을 갖고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면서 “당시 일본은 중국과 한국 등 여러 지역으로 침공했다. 1940년대 일본에 전쟁 기운이 물밀듯 밀려오는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비교적 적은 예산에 세트를 짓지도 못했고 촬영도 한정된 공간에서 이뤄졌다. 그럼에도 앞서 기자 시사회에서 공개된 영화는 특유의 오밀조밀한 줄거리와 서스펜스로 호평받았다. 구로사와 감독은 “역사에 바탕을 뒀지만 픽션이다. 영화를 서스펜스나 멜로드라마로 구현하는 데도 신경을 쏟았다”고 했다.
그는 “지난 16일 일본에서 공개된 영화가 좋은 평가를 듣고 있다”고도 전했다. 지금까지 자국 전쟁 범죄에 소극적이었던 일본 현지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이야기다. 영화는 일본 공개에 이어 조만간 한국에서도 정식 개봉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시대를 마주하는 작업이 굉장히 흥미로웠다”는 그는 ‘스파이의 아내’를 만날 한국 영화 애호가들에게도 가감 없는 조언을 구했다. “서스펜스·멜로 등 장르적인 매력도 있는 영화입니다. 무엇보다 현재와 밀접하게 이어지는 일본의 과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합니다. 관객 여러분께서 판단해주세요.”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