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제주도는 ‘영원한 휴가지’다. 빌딩과 아스팔트, 아파트, 자동차로 가득찬 도시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숲과 초원 오솔길 바다를 한꺼번에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곳곳을 지배하는 ‘빨리빨리’ 문화가 ‘느려도 좋음’으로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순간을 어떤 곳보다 확실하게 제공하는 곳이 바로 제주도다. 그런 제주도를 요즘 가보면 놀랍게 바뀐 풍광을 맞이하게 된다. 오지의 숲 사면이 다 파헤쳐진 광경이 이 섬 곳곳에서 보이고, 짓다가 만 콘크리트 건물 뼈대가 수년째 흉측하게 방치된 모습도 자주 대면하게 된다.
이런 풍경이 시작된 건 2002년 ‘제주특별자치도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부터다. 특별법이 제주도를 관광 교육 의료 중심의 첨단 국제자유도시로 만든다고 못 박자 중국인과 중국 투기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국인이 제주도에 토지 또는 건물, 주택을 사면 각종 세제혜택이 주어지고 영주권도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관광객으로만 몰려오던 ‘유커(游客)’들은 그 즈음부터 부동산 투자자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곳곳에 중국 자본으로 완성된 유커 전용 호텔들이 만들어지고, 유커 전용 관광시설이 생겨났다. 제주도 부동산 거래의 90% 이상이 중국인에 의해 이뤄졌다. 어떤 중국 갑부는 제주도의 산 전체를 통째로 사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인 전용 카지노를 짓겠다며 온통 숲이었던 땅을 죄다 파헤치기도 했고, 한국의 의료기술을 찾는 유커들을 대규모로 체류시킬 영리병원 휴양단지 예정지도 정해졌다. 그렇게 ‘느리고 여유로운 관광’이란 제주도의 대명사는 ‘부동산 투기’와 ‘대규모 개발’이란 단어로 바뀌어 갔다.
끊이지 않을 것 같던 유커의 물결은 2014년 하반기 이른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사태’로 막을 내렸다. 그때부터 제주도는 또 바뀌기 시작했다. 몰려들던 중국 투기자본은 개발 중인 곳곳의 땅만 파헤쳐 놓은 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이곳저곳의 개발예정 부지들은 짓다만 흉물로 방치됐다.
국제자유도시의 꿈은 한번의 파고에 떠내려가 버렸다. 엄청나게 오른 부동산 가격에 제주도민들마저 집을 사기 어려워졌고, 거품이 꺼지자 ‘투자’로 여겨 부동산을 사놨던 사람들은 망해갔다. 속으로만 곪아가던 이 섬의 속앓이는 지금 천연두 자국처럼 표면으로 거세게 터져 나오고 있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강행’을 외치던 도정(道政)의 개발 제일주의 정책은 폐기되기 일보 직전이다.
그제 원희룡 제주도지사의 ‘난개발 중단 선언’은 지난 10여년간 제주와 제주 주민들의 정서를 지배해 오던 ‘땅 파고 건물 올리고 오락시설 짓는 일’이 잘못됐던 일이라는 자기반성과도 다름없어 보인다. 제주도에는 제주도만의 딜레마가 있는 듯하다. 세계인이 찾아와 먹고 마시고 즐기고 노는 곳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이와는 정반대로 ‘느려도 되고 여유로워도 되는’ 예전의 제주도를 간직해야 한다는 생각. 이 두 가지 말이다. 지난 10여년 동안은 전자(前者)가 후자를 지배했다. 개발해 더 많은 외국인 관광객을 불러 모으면 67만 제주도민이 나눠 가질 파이가 더 커질 것이란 희망에 ‘올인’한 세월이었다.
두 갈래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가장 훌륭한 선택은 조금 더 알던 길을 택하는 것이다. 지금 제주도엔 ‘한국인의 최고 휴가지’로 남는 길이 최선의 선택처럼 보인다. 예전처럼 자동차로 달려도, 자전거로 달려도 숲과 바다와 나무와 풀, 오솔길이 나오는 섬. 예전의 그 섬인데 훨씬 안락하고 훨씬 편하며 훨씬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제주도를 만드는 일 말이다.
신창호 사회2부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