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환 “50년 넘게 연기했지만… 배우 역할은 처음”

입력 2020-10-26 04:05
다음달 18일 개막하는 ‘더 드레서’로 9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하는 배우 송승환. 그는 “극장이 좋은 이유는 일상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 “어려운 시간을 훌훌 털어내는 연극이길 바란다”고 했다. 권현구 기자

송승환(63) PMC프러덕션 예술총감독은 근 20년 동안 제작자 겸 연출자로 이름을 떨쳤다. 한국에서 공연 관광의 시초가 된 비언어 퍼포먼스 ‘난타’가 그에게서 탄생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도 송승환을 수식하는 타이틀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1965년 9살 아역배우로 시작해 50여년을 연기해온 그는 “배우일 때 가장 큰 자존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예인(藝人)’이다.

다음 달 18일 서울 정동극장 무대에 오르는 ‘더 드레서’는 송승환을 사로잡은 연극이다. 2011년 명동예술극장의 ‘갈매기’ 이후 9년 만의 연극 복귀작으로 ‘더 드레서’를 택한 그는 “나이든 배우로서 인생 3막을 여는 작품이 될 것 같다”며 “벌써 다음 무대를 같이 하자는 제작자 지인들의 연락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합치면 100편을 훌쩍 넘을 거예요. 별의별 역할을 다 해봤는데 정작 배우 역할을 한 적이 없었어요. 더구나 늙은 인물 연기를 제대로 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기대가 큽니다.”

영화 ‘피아니스트’ 각본가이자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명 작가 로날드 하우드의 ‘더 드레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는다. 리어왕 공연을 앞둔 노(老)배우와 드레서의 이야기로 송승환은 평생 배우로 살아온 선생님 역을 맡았다. 드레서 노먼 역으로는 안재욱과 오만석이 번갈아 출연한다.

극장에서 공연 의뢰를 받은 송승환이 수많은 작품 중 ‘더 드레서’를 택한 이유는 선생님 역할이 자신과 포개진다고 느껴서다. 마침 이 극을 국내 초연한 극단 춘추 문고헌 대표를 1983년 뉴욕에서 만났던 그는 이번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을 뒤져 1부만 남아있던 수기 대본 복사본을 구해 읽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선생님이 극에서 배우이면서 제작자예요. 그래서 감정이입이 잘 됩니다. 연기 혼을 불태우다가도 경영자로서 배우 출연료를 깎으려고 애쓰죠. 갑을관계 전복을 재치 있게 그리면서 인생과 죽음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어요.”

연습은 늘 화기애애하다. 배우와 제작진 사이의 신뢰가 두터워서다.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개·폐막식 부감독 겸 폐막식 총연출을 맡아 송승환을 보좌한 장유정 연출가가 각색하고 연출을 맡았다. “장 연출은 최근 영화 ‘정직한 후보’가 흥행해 영화 러브콜이 많은데도 흔쾌히 함께 해줬어요.”

50여년간 방송과 무대를 넘나들며 활약해온 그에게 얼마전 시련이 찾아왔다. 올림픽 직후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것이다. 현재는 가까이 있는 사람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고 글씨는 아예 읽기 어려울 정도다. 전자기기 음성지원 기능과 다른 이의 입을 빌려 대본을 외우는 그는 지난해 안판석 감독의 MBC 드라마 ‘봄밤’에 출연하는 저력을 뽐냈다.

“안 감독이 처음 드라마를 같이 하자고 했을 때는 다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망설였어요. 그런데 감독이 ‘왜 못하겠느냐’며 용기를 줬죠. 이제는 익숙합니다. 시야가 조금 닫히니 오히려 상대 배우 목소리를 더 귀 기울여 듣게 됐어요. 배우로서 고마운 일입니다.”

송승환이 걸어온 길을 복기할 때 제작자로서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사물놀이를 모티브로 만든 ‘난타’는 1997년 국내 초연 이후 한국 공연 최초 누적 관객 1000만명 달성, 2003년 아시아 최초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오픈런 공연 등 대기록들을 연이어 써냈다. 그에게 ‘난타’는 자긍심의 동의어다.

“일제강점기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억눌려왔던 민족 정서가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분출된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恨)이 ‘흥’(興)이 된 거죠. ‘난타’는 그 흥을 담은 거죠.”

일이 너무나 고단해 ‘대체 왜 한다고 했을까’ 수없이 되뇐 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일도 자산이 됐다. 전통과 현대를 드라마틱하게 결합했다는 평가를 받은 평창동계올림픽은 드론으로 구현한 대형 오륜기 등 명장면들을 여럿 연출했다. 송승환은 “개성 강한 예술가들의 의견을 한데로 모으는 훈련”이 제작자로서도 큰 공부가 됐다고 했다.

그는 한국 뮤지컬계 대표 프로듀서 8인의 한 명으로서 코로나 사태 이후 어려움을 겪는 뮤지컬 배우 및 스태프들을 위한 기금 마련 콘서트를 추진했다. 다만 8월 29~30일 열릴 예정이었던 콘서트는 코로나 확산에 따른 공공극장 폐쇄로 무산됐다.

“코로나로 공연계 전체가 고통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프로듀서들이 최근 한국뮤지컬협회 등을 통해 민간 공연계에도 부과되는 ‘한 좌석 띄어 앉기’가 생업 측면에서 부담이 극심하다는 점을 정부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는 최근 붐을 이루는 온라인 공연에 대해서도 고민을 덧댔다. “공연은 온라인으로 감동과 장르적 가치를 전하기가 매우 힘든 것 같아요. 갓 뜬 싱싱한 회를 통조림에 넣어 전하는 느낌이에요. 온라인은 그동안 공연에서 어려웠던 2차 수익 사업의 하나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극장 관객들이 ‘더 드레서’를 통해 얻어갔으면 하고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 답은 ‘위로’였다. “바이러스로 일상이 매몰된 지 벌써 8개월이 지났어요. 지친 심신을 다시 가득 채우는 극이 됐으면 해요.”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