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는 부양의무자 아니야. 자식 없고 장애 있으면 무료로 들어갈 수 있는데 왜 요양원에 돈을 못 내서 쫓겨나? 주소지 분리하고 장기요양등급 신청해.”
죽은 부모가 남긴 사채에 시달리면서 귀가 들리지 않고 거동마저 불편한 할머니(손숙)를 모시고 사는 지안(아이유). 밀린 입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다는 지안에게 동훈(이선균)이 말한다. “그런 거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냐.” 안쓰러움과 답답함이 뒤섞인 동훈의 한마디와 당황한 지안의 눈빛이 이어진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이다.
지안의 인생은 어릴 때부터 줄곧 가시밭길이었다. 불행에 지칠 대로 지쳐 겨우 성인이 된 지안의 주변에 그런 걸 가르쳐주는 어른은 없었다. 몇 번 도와주는 듯하다가 슬그머니 도망가는 어른, 모른 척하는 어른, 무시하고 착취하는 어른만 있었을 뿐.
2008년 경기도 안산에서 만 8세의 여자아이가 성폭행을 당했다. 아이는 수차례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다쳤다. 검사는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이유로 징역 12년형을 선고했다. 어른은 아이를 파괴했고, 져야 할 만큼의 책임도 지지 않았다.
조두순의 출소가 50일도 채 남지 않았다. 12년 동안 어른들의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윤화섭 안산시장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조두순 격리법’으로 불리는 ‘보호수용법’(출소 후에도 사회와 격리돼 보호수용 시설의 관리·감독을 받도록 하는 법) 제정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지만 정부의 답변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인 20만명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마감됐다. 조두순은 안산으로 돌아갈 준비를, 피해자 가족은 안산을 떠날 준비를 한다.
2년 전 방영 당시 나의 아저씨는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 서로를 통해 치유되는 이야기로 호평을 받았다.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되면서 해외 인사들의 극찬도 이끌어내고 있다. 잔뜩 움츠러든 채 투명인간처럼 살아온 지안은 동훈이라는 어른을 알게 되면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세밀하게 묘사된 인물들의 심리, 우울하지만 현실적인 삶의 모습에 국내외 시청자들은 공감했다. 인간의 현실은 국적을 초월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국경을 넘어선 잔인한 현실을 드라마는 따라가지 못한다.
외신들은 지난 20일 호주 퍼스 남서쪽 시골 마을에 사는 11세 소녀 안네리에세 우글이 퍼스 어린이병원에서 숨졌다고 보도했다. 우글은 같은 마을에서 자신을 수차례 성폭행했던 범죄자가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 자해했고, 무책임한 어른들의 세상을 떠나버렸다.
수원지검 안산지청은 법원에 오후 9시부터 이튿날 오전 6시까지 조두순의 외출, 음주 등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특별준수사항 추가 사항을 법원에 요청했다. 이 조치의 실효성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조두순 사건은 아침 등굣길에 발생했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아동 성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시간은 오후 12~6시다.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보호관찰관 1인당 사건 수는 118건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보호관찰관 1인당 사건 수는 27.3건이다. 법무부는 조두순을 1대 1로 보호관찰하고 24시간 위치추적을 하겠다고 밝혔다. 사회 안전망에 대한 어른들의 책임감을 두고 볼 일이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은 너무 많아서 헤아리기 힘들다. 돌봄 사각지대의 피해자인 ‘라면 형제’에겐 후원금 20여억원이 모였다. 조두순 피해자 가족의 이사 지원 비용으로 2억원이 넘게 모였다. 그래도, 이 사실만으로 아이들에게 세상이 살 만하다고 할 수는 없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이 희생된 불행한 사건마다 ‘어른들이 미안해’라는 말이 클리셰처럼 등장한다. 반복되는 비극에도 아이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순간의 죄책감을 모면하려는 어른의 거짓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다.
임세정 국제부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