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대기점도 선착장에 내리자 방파제 끝에 그리스 산토리니풍의 작고 예쁜 예배당이 이정표처럼 맞았다. 바로 전남 신안군의 명물이 된 ‘12사도 순례길’의 첫 시작을 알리는 ‘베드로의 집’(김윤환 작가)이었다. 내부의 하얀 벽엔 작은 창문이 있어 바다가 바라보이고, 창문 위에 아주 작은 십자가가 음각돼 있어 명상의 기분을 자아냈다.
‘한국 현대미술의 아버지’ 김환기의 생가가 있는 신안군이 ‘예술의 섬’으로 거듭나고 있다. 신안군은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많은 1025개 섬을 보유하고 있다. 군은 이를 ‘1004(천사)섬’으로 브랜드화시켜 섬마다 미술관·박물관을 짓는 ‘문화도시 1도(島) 1도 1뮤지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증도면에 속한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의 ‘12사도 순례길’은 그 일환으로 지난해 조성됐다.
이곳은 원래는 주목받지 못한 섬이었다. 하지만 천혜의 갯벌이 있고, 한국 기독교사에 빛나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 역사의 스토리가 숨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현대미술을 입혔다. 국내외 작가 11명이 12사도 이름을 따 제작한 건축미술 작품을 섬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에 설치한 것이다. 프랑스 작가 장 미셸 후비오와 얄룩 마스가 공동 제작한 '바르톨로메오의 집’은 호수 위에 떠 있었다. 호루라기 모양의 작품으로 햇빛에 반짝이는 색유리와 스틸의 앙상블이 감동적이었다.
이곳은 ‘자연환경+역사+예술’의 삼박자가 결합해 섬의 재발견이 이뤄지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부럽지 않은 순례 코스로 부상하고 있다. 동해에서는 볼 수 없는 끝없는 갯벌, 바닷물에 감겼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며 섬을 잇는 ‘노둣길’, 전통적인 어로방식인 ‘독살’ 등 특유의 풍광이 도시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벌써 입소문이 나 해외 언론에서도 소개됐을 정도다.
‘1도 1뮤지엄’ 아이디어는 세 번째 임기를 이어가는 박우량(65·사진) 신안군수의 야심찬 기획 행정에 따른 것이다. 총 24개 미술관·박물관을 구상했고, 현재 흑산도의 새조각박물관과 철새박물관 등 11곳을 완공했다. 자은도의 양산해변에 있는 ‘뮤지엄파크’에는 수석미술관과 조개박물관이 개관했다. 삼성미술관 리움을 지은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하는, 일명 ‘인피니또 뮤지엄’도 이 섬에 들어선다. ‘무한기둥’으로 유명한 박은선 등 국내외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꾸며지는 조각 전문 미술관이 탄생하면 ‘일본 예술의 섬 나오시마’의 신안 버전으로 거듭날 거 같다.
역사적 유산도 미술관 자원으로 쓰인다. 조선시대 중인 문인화가 우봉 조희룡이 유배시절을 보내며 홍매화 그림을 탄생시켰던 임자도에는 조희룡미술관이, 김대중 대통령을 배출한 하의도에는 동아시아인권평화미술관과 대한민국정치사진박물관이 들어선다. 바둑 명인 이세돌이 탄생한 비금면에는 이세돌박물관이 이미 생겨났다.
컬러 마케팅도 한창이다. 안좌도와 박지도는 마을 지붕과 다리를 보라색으로 칠해 ‘보라마을’로 불린다. 섬마다 특색 있는 꽃과 나무를 조성하는 섬플라워랜드 사업도 컬러 마케팅의 하나로 진행 중에 있다. 섬의 환경에 맞고 스토리가 있는 자생식물과 야생화를 심는데, 흑산도는 주황 원추리, 선도는 노랑 수선화, 압해도는 붉은 애기동백 등으로 각각의 색을 갖는다.
박 군수는 “자연경관만 있어도 안 되고, 미술관만 있어도 한계가 있다. 자연과 문화를 결합시켜야 방문객들이 오래 머물고 자주 찾는 신안이 될 수 있다”며 “단순히 관광객만 유치하는 게 아니라 ‘그 섬은 특별나다’는 인식이 있으면 신안산 농수산물도 더 잘 팔리지 않겠냐”고 말했다.
신안=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