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끝났음을 알리는 의식은 1896년에 만들어졌다. 그해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상원의원은 모든 여론조사가 마감된 후 자신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상대 후보인 윌리엄 매킨리 공화당 상원의원에게 전보를 보냈다. “선거 결과가 귀하의 승리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브라이언 이후 패자의 승복 선언은 대선의 승자를 결정짓는 형식이 됐다. 투표가 끝나면 패배한 후보가 먼저 나온다. 그는 지지자들의 수고를 치하하고 그들의 대의가 계속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한편 상대가 승리했음을 인정한다. 이어서 승자가 등장해 승복 선언에 감사를 표하면서 자신의 발언을 시작한다.
투표 결과를 둘러싼 논란이 가장 컸던 2000년 대선 당시 민주당 앨 고어 후보는 선거일 밤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의 승리를 인정했다가 플로리다주 개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전화로 승복을 철회했다. 그리고 재검표 전투에 돌입했다. 대법원이 5대 4로 플로리다주 재검표를 중단시켰을 때, 고어는 다른 지역에서 재검표 논란을 이어갈 수 있었고 의회에 분쟁을 제기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고어는 판결 다음 날 선거 결과를 받아들인다며 승복 연설을 했다. 그는 “오늘 밤, 저는 국민으로서의 단결과 민주주의의 힘을 위해 양보합니다”라고 덧붙였다. 미국 시사잡지 애틀랜틱은 이런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승복 연설은 단순히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보고가 아니라면서 그것은 새 대통령의 권위를 구성하는 형식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2주 앞으로 다가온 올해 미국 대선에서는 승복이 불투명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질 경우 부정선거를 주장하면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트럼프가 승복을 거부한다면 선거를 끝내기가 어려워진다. 우편투표는 올해 미국 대선의 불안정성을 높이는 또 하나의 요인이다. 코로나19 감염 우려로 우편투표가 급증했고, 우편투표는 개표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승자가 가려지기까지 며칠 또는 몇 주가 걸릴 수 있다.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는 당일 밤 개표에서 지더라도 우편투표로 뒤집을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승복 선언을 미룰 것이다.
투표 이후 상당 기간 당선자가 없는 초유의 진공 상태가 벌어질 수 있다. 미연방법상 모든 주의 선거 관련 분쟁을 정리하고 선거인단을 어느 후보에게 줄지 결정하도록 한 12월 8일까지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판단은 연방 하원이나 대법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 사이 거리에선 지지자들 간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미 좌우파 온라인 네트워크에서는 서로 상대의 선거 불복 내지 쿠데타 음모를 경고하며 “대비하라”는 메시지가 넘쳐나고 있다.
미국에서 선거 불복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큰 건 사실이다. 현실화한다면 11월 미국은 태풍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선거 불복이 트럼프의 허풍이며 득표 전략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있다. 그에게 선거 불복을 떠들 ‘입’은 있으나 이를 실행할 ‘손발’은 없다는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16일 칼럼에서 “트럼프는 떠나지 않겠다고 위협할 수 있지만 다른 많은 사람이 참여하지 않고는 실제로 시도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선거인단 결과가 바이든을 승자로 분명히 보여주는 경우, 트럼프가 뭐라고 주장하든 그는 백악관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 선거 판단이 하원이나 대법원으로 넘어가는 경우에도 수많은 의원과 대법관이 무모한 범죄에 함께 가담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블룸버그는 “주 의회, 하원의 공화당원 그리고 대법원이 트럼프의 재집권을 위해 민주주의를 전복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전망했다.
김남중 국제부장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