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빗장 공동체를 넘어서

입력 2020-10-21 04:01

도시 곳곳에 ‘빗장 공동체’가 늘어나고 있다. 보안을 이유로 장벽을 세우고, 문을 설치하고, 출입 자격을 사람 또는 로봇이 일일이 검문하는 경비 구역이 생겨난다. ‘외부인 출입 제한’은 이제 부와 권력과 신분의 상징이 됐다.

안전한 내부와 불안한 외부를 분리하는 장벽은 현대의 취향이다. 지어지는 아파트마다, 들어서는 빌딩마다, 때때로 공공 공간조차 ‘빗장’을 원리 삼아 건축된다. 마을 여기저기 방범의 분계선이 선명히 들어서고, 도시를 미로로 만드는 장벽들이 물샐틈없이 생겨나는 중이다. 현대인은 어느새 ‘빗장 애착증 환자’로 전락해 버렸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드워드 블레이클리와 메리 스나이더는 빗장 공동체를 “공공 공간을 사적으로 점유해 출입을 제한하는 주거단지”로 정의한다. 빗장 공동체는 장벽을 두어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도로 샛길 공원 놀이터 운동장 풍광 학교 도서관 등 공공 공간을 사적으로 점유하며, 사회경제적으로 동질적 지위에 있는 주민끼리만 어울리는 폐쇄적 취향 공동체를 형성한다. 빗장 공동체의 급속한 확산은 현대 도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장벽이 일상 공간의 핵심 조직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빗장 공동체를 접할 때마다 솔직히 둥지와 함께 요새가, 아니 감옥이 떠오른다. 안전한 곳에서 몸을 쉬는 아늑함과 오들오들 떨면서 자신을 가두는 불안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거주지를 굳세게 둘러싼 장벽을 자궁의 내막처럼 생각하나 실제로 이 공간은 일상적 공포가 형식화된 것이다.

‘유동하는 공포’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근원적인 감정을 ‘공포’로 압축한다. 현대적 삶에서 공포는 물처럼 흐르고, 어디에나 스며들며, 우리를 모르는 사이에 숨 막히게 한다. 죽음의 공포, 범죄의 공포, 재해의 공포, 테러의 공포, 배제와 잉여의 공포 등 우리 삶은 온갖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다.

공포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발적 악마가 된다. 직장을 잃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나이가 들거나 병들거나 해서, 빗장 공동체 바깥으로 밀려나는 순간, 공포가 곧장 현실로 다가올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빗장 공동체 내부로 들어가려 애쓰고, 그 안에서 거주하는 것을 자기 능력의 증명과 인생의 자부로 여기며, 어떻게든 내부자로 남기 위해 자신을 자책하고 타자를 가학한다. 더 나아가 빗장 공동체 바깥의 사람들을 무능력자로 경멸하거나 잠재적 테러 분자로 인식하면서 혐오한다.

안팎을 분단하는 빗장의 물리적 현현은 장벽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사회적 표지로 작용한다. 빗장 공동체는 크든 작든 특권을 가시화함으로써 만인 평등의 원리 위에 구축된 시민사회를 부정한다. 학교, 공원, 도로,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등 시민 생활의 기초 공간은 모두 소수만 누리던 것을 시민 전체가 즐기게 하려고 생겨났다. 장벽을 무너뜨리고 경계를 뛰어넘어 모든 종류의 특권을 철폐함으로써 ‘닫힘’을 ‘열림’으로 바꾸어온 것이 역사의 선명한 방향성이었다. 오늘날 빗장 공동체가 사람들이 살고 싶은 공간이 되고, 현대적 삶의 물리적 이상형이 되어 버린 것은 문명의 퇴행이다.

사회 전체에 촘촘히 건축된 밀실들은 동등한 시민들이 열린 광장에서 서로 어울리는 민주와 공화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증후이다. 빗장은 인간 사이에 분할선을 그음으로써 철폐된 카스트를 부활시키고 불가촉천민을 생산한다. 빗장의 특권을 즐기고 또 갈망하면서 우리는 배제하면서 배제당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새로운 봉건주의에 중독된다. 그러나 전락의 불안에 늘 쫓기는 강박증 환자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다. 바깥의 안전이 없으면 내부의 안전도 없다. 우리가 정말로 안식하려면 빗장 바깥의 삶도 무섭지 않아야 한다. 평온은 빗장을 올리는 데 있지 않고, 빗장을 내리고 특권을 철폐해 모두가 안전한 ‘우애의 공동체’에 관심을 쏟는 데에서 온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