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얼굴 없는 사이버 가수 ‘아담’이 등장하면서 국내 가요계는 떠들썩했다. 그리고 23년 후 얼굴 없는 인공지능(AI) 작곡가가 만든 곡이 신인가수 앨범으로 제작되는 시대가 열렸다. 해외에선 AI가 그린 그림이 억대 몸값에 낙찰됐고, 면역 항암제 개발을 AI가 주도하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이처럼 AI를 활용한 창작물·연구 성과는 비약적으로 늘고 있지만 한국의 AI 지식재산 체계는 미흡한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AI 지식재산 국가전략 수립에서 나아가 AI 지식재산 특별법 제정을 위한 골든타임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AI 창작·연구 어디까지 왔나
AI는 미술·음악·작문·발명 등 인간 전유물로 여겨졌던 창조적 활동을 직접 수행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2018년에는 AI가 그린 인상파풍 그림이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약 5억원에 낙찰됐고 유럽에서는 AI가 발명한 특허(음식용기·램프) 출원이 현실화됐다. 지난달 국내에서는 한 음원서비스업체가 ‘인간 vs AI 음악창작 대결’ 공모전을 기획했고 지난 7일에는 AI 작곡가 이봄이 작·편곡한 곡이 신인가수 하연의 데뷔 싱글 앨범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AI는 신약 개발 분야에서도 종횡무진 활약한다. 화이자는 IBM의 의료 AI ‘왓슨’을 활용해 면역 항암제를 개발 중이며 노바티스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세포·유전자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기업이 AI를 활용한 신약 개발에 투자하는 건 비용·기간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제약공업협회에 따르면 AI를 활용하면 한번에 100건 이상의 논문 탐색이 가능해 신약 개발 기간을 절반 이상 단축할 수 있고 개발 비용도 절반 수준으로 절감하게 된다.
AI 지식재산 국가전략 수립해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비대면의 일상화, 디지털 전환의 전면화 등으로 경제·산업 구조는 AI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맥킨지는 2030년까지 세계 기업 70%가 AI를 활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중국·일본 등 주요국은 AI에 의한 발명·법제 정비를 선제적으로 추진 중이며 AI 핵심기술에 대한 지식재산 권리화를 지원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디지털 뉴딜 정책 등을 국가 어젠다로 추진하고 있지만 AI 지식재산 관점의 법제 개선과 정책 지원 등 노력은 부족한 실정이다. 주요 경쟁국보다 AI 기술력·특허 경쟁력도 떨어진다. 미국과 중국은 전 세계 AI 특허의 70%를 양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기술이 1.8년 뒤처져 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4일 ‘제3회 지식재산의 날 기념행사’에서 “정부는 연구자와 창작자들이 지식재산을 효율적으로 확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겠다”며 “데이터·저작물을 AI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바이오, 소재·부품·장비와 같은 국가 전략 산업 분야에서 향후 세계 시장을 선도할 강력한 지식재산을 확보하고 특허 데이터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겠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소속 국가지식재산위원회는 지난 6월 ‘AI 지식재산특별전문위원회’를 출범시켜 AI 시대에 대응한 범정부 AI 지식재산 정책을 수립한다고 밝혔다. 주요 과제는 지적재산(AI-IP) 창출 촉진, 법제도 및 규제·관행 개선, AI 창작의 기본원칙 확립, AI 지식재산특별법 논의 등이다.
박은영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창출전문위원(윕스 상무이사)은 “AI 지식재산은 연구·개발자가 활용하는 관점에서도 중요하지만 AI가 창출한 성과물의 소유권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도 상당히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라며 “쉽게 답을 찾긴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에 다각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부는 민간·공공기관이 보유한 특허 정보, 기술거래 정보, 특허심판·소송 정보 등 다양한 특허 빅데이터 생산·가공·유통을 원스톱으로 할 수 있는 플랫폼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AI가 다양한 데이터·저작물을 학습데이터로 자유롭게 활용하도록 저작권법 개정 등 법·제도 정비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이와 함께 전략적 특허 조사·분석(IP-R&D)을 통한 핵심·원천 특허 확보에도 집중한다. 소재·부품·장비, 바이오 등 국가 전략 산업에서 기업이 구축한 장벽 특허 분석을 통해 효율적인 R&D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도록 돕는 것에서 나아가 특허가 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최고의 권리 범위를 확보하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국가연구개발사업 공통 규범으로 내년 1월 시행 예정인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 특허 등 지식재산권과 관련한 내용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7조원이라는 대규모 국가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 법규에 IP 항목이 전혀 없는 것이 문제다. R&D 결과가 기존 특허와 중복돼 예산이 낭비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국가연구개발혁신법 시행령에 특허 동향 조사와 전략적 지식재산권 조사·분석 규정 등을 반영하고 R&D와 IP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특히 IP-R&D 지원 분야를 전 분야로 확대·의무화하되 지원 대상 사업과 방식 등은 부처 자율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AI 지식재산 특별법’ 제정 목소리도
AI가 생산한 저작물의 지식재산권을 진흥·보호하기 위해서는 ‘AI 지식재산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손승우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인공지능 지식재산 특별법 제정 방안’ 보고서에서 “현행 저작권법·특허법 등은 인간의 창작물과 발명만을 보호하므로 AI 창작발명은 보호하지 않는다”며 “국내 AI 산업발전을 위해 AI 지식재산권 신설, 데이터 보호 및 이용 촉진 등을 골자로 하는 ‘AI 지식재산 특별법’ 제정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인간과 AI 지식재산을 구별하고 별도의 등록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손 교수는 “AI 지식재산에 일정한 보호를 제공하되 그 수준은 AI 산업에 대한 투자를 유인하는 정도여야 한다”며 “과도한 보호로 인해 인간의 권익을 저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AI가 창작한 지식재산을 보호받고자 할 때는 해당 창작물 목록과 함께 개발자 정보 등을 등록하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AI 창작에 대한 인센티브도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최재필 기자 jp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