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라 불렀는데, 이젠 세입자님” 임대인-임차인은 전쟁 중

입력 2020-10-14 00:02
사진=연합뉴스

임차인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상한제가 지난 7월 동시에 도입된 이후 부동산 시장 곳곳에서 임대인과 임차인 간 소리 없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세입자가 집주인의 실거주 여부를 증명하라고 윽박지르다 소송이 벌어지는가 하면, 새 전셋집이 절박한 임차인을 상대로 이면계약을 종용하는 임대인도 등장했다. ‘부동산 전쟁’에 내몰린 임대인과 임차인 모두 주택 임대차 3법이 누구를 위한 법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상황이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40대 한모씨는 “실거주 사실을 증명하라”는 세입자 요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씨와 세입자 간 전세계약은 지난달 26일까지였다. 세입자는 계약이 만료되면 집을 비워주기로 한씨와 지난 6월 합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주택임대차보호법이 통과되자 세입자는 “주위 전셋값이 너무 올라 갈 곳이 없다”며 계약갱신청구권 사용을 통보했다. 한씨가 실거주 의사를 거듭 밝혔지만 세입자는 ‘어떻게 믿느냐’면서 퇴거를 거부해 지금까지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한씨는 13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나중에 직접 집에 와서 보라고 해도 못 믿겠다는데, 이러다간 아이 재학증명서와 카드사용기록까지 보여달라고 할 판”이라며 혀를 찼다.

둘의 관계는 ‘퇴거 위로금’ 갈등으로 급격히 나빠졌다.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하겠다는 세입자에게 한씨가 먼저 “좋게 끝내자”며 이사비와 복비 명목으로 300만원의 위로금을 제시했는데, 세입자가 처음엔 600만원을 부르더니 1000만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결국 한씨는 소송을 진행키로 했다. 그는 “이게 내 집인지 세입자 집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경남 창원에 사는 김예슬씨(가명·39·여)도 세입자와 갈등 중이다. 김씨는 “그동안 세입자와 ‘언니’ ‘동생’하며 살갑게 지내왔는데 지금은 그냥 ‘세입자님’이라고 부른다”며 “주먹다짐이나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다른 집을 계약해 일시적 2주택자가 된 김씨는 전세로 내줬던 집을 오는 12월 팔기로 예정하고 있었다. ‘세입자 언니’와도 이 계획에 대해 지난해 합의를 했었다. 하지만 지난 8월 세입자가 계약갱신청구권을 주장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김씨는 시세보다 수천만원 싸게 집을 팔거나, 새 주택에 입주하지 못해 자칫 배액배상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김씨는 “사정을 잘 아는 세입자가 ‘이번에 법 나온 거 아시죠’라는 문자 메시지만 달랑 한 통 보내는 걸 보면서 역시 사람은 길게 봐야 하나 싶더라”며 “하루아침에 뒤통수 맞은 격”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통계도 시장의 혼란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에 접수된 사건은 지난 7월 2건에서 법 시행 이후인 8월 131건, 9월 149건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임대차법 관련 민원 수(7월 31일부터 9월 30일까지)도 지난해 동월 1만1103건에서 1만7839건으로 증가했다. 특히 적용 범위(250건→838건)와 임대차기간(612건→2897건), 보증금 및 차임증감(94→599) 항목이 뚜렷하게 늘어났다. ‘계약갱신청구권’ ‘전월세상한제’가 주택 임대차 3법의 골자임을 감안하면 법 시행이 민원 증가를 견인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수혜자로 평가받는 임차인 사이에도 ‘이 법이 우리 편이 맞느냐’는 불만이 나온다. 새 전셋집을 알아보던 30대 직장인 최모씨는 “전세매물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미래 손실을 세입자에게 전가하려고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거는 집주인들도 있다”며 혀를 내둘렀다. 최씨는 최근 한 임대인으로부터 5% 이상의 증액과 함께 임대인이 내야 하는 보증보험료까지 부담하라는 내용의 이면계약서 작성을 요구받았다고 한다.

임대인들은 “심각하게 재산권을 위협받고 있다”며 아우성이다. 전세 세입자가 잠재적 갈등 원인으로 부각되면서 최근 부동산 시장에서는 전세 낀 주택의 가치가 평가절하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강북 지역에 사는 30대 서모씨는 최근 아파트 한 채를 시세보다 3000만원 싸게 팔아야 했다. 초등학교 도보 등교권인 아파트라 부동산에 내놓자마자 문의가 많이 들어왔는데 세입자가 있다는 말에 대부분 매수 의사를 접었기 때문이다. 서씨는 “아파트를 처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싸게 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경기도 시흥에 살던 30대 배모씨도 주택 매도를 위해 공인중개사를 찾았다가 “임차인이 있으면 도저히 매매가 안되니 세입자를 구워삶아 실입주 매물로 만들어오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배씨는 “내가 직접 들어가 일정 기간 살다가 집을 팔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와중에 정부의 해석이 오락가락했던 것도 부동산 시장이 혼란에 빠지는데 한몫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8월 ‘집주인이 임대를 놓은 상황에서 주택을 제삼자에게 매도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으며, 집주인이 해당 주택에 실거주하는 경우 계약갱신 거절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달 11일 ‘제삼자 소유권 이전 전에 세입자가 계약갱신을 요구했으면 매수자가 실거주를 이유로 갱신거절을 할 수 없다’고 다시 해석했다. 국토부의 앞선 해석만 믿고 등기이전을 하지 않은 채 실매수한 이들이 곤경에 처한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경기도 안양에서 신혼집을 알아보던 30대 A씨는 “실매수자는 갱신청구를 거절할 수 있다고 해서 계약했는데 졸지에 앞으로 2년6개월간 내 집 놔두고 다른 곳에서 월세살이하게 생겼다”고 억울해 했다.


갈등에 지친 시민들은 국토부 등 관계 당국이 제때 민원 응대라도 해 달라고 호소한다. 김예슬씨는 “국토부에 전화 연결도 안 돼 결국 서면 민원을 넣고 한 달 걸려 받은 답변은 그냥 관련 법을 복사해 붙여넣은 수준이었다. 헛웃음만 나왔다”고 했다. 김씨는 “정책을 잘못 만들었으면 불편을 겪고 있는 시민 응대라도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문제가 될 때마다 이랬다저랬다 말 바꾸기만 하는 형국”이라고 비판했다.

강보현 기자 bob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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