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재무’는 아버지 이관범과 어머니 안종금 사이에서 태어난 육 남매 중 장남이다// ‘이재무’는 시를 쓰고 출판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지금 사무실에 와 있다// 하나의 ‘이다’와 무수한 ‘있다’로 구성된 존재가 지금의 ‘나’이다.”(졸시 ‘실존주의’ 전문)
과학이 사실을 통해 진실을 구현하는 학문이라면 문학은 상상, 공상, 환상, 체험의 굴절 등을 통해 진실에 이르는 장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은 자신의 경험 현실을 질료로 삼을지라도 그것을 사실 그대로 재현해서는 보편적 감동과 진실에 이를 수 없다.
우리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인간 실존의 해명과 구원을 위해서다. 제아무리 첨단과학이 발전을 거듭한다 해도 인간 실존과 관련된 제 문제 이를테면 삶과 죽음, 그리움과 기다림, 슬픔과 기쁨, 우울과 권태 등을 다룰 수 없다. 인간 실존을 둘러싼 질의와 응답은 오로지 인문학, 그중에서도 특히 문학을 통해 규명될 수 있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최첨단 디지털 기술 문명시대에도 우리는 문학 행위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실존이란 무엇인가? 내 식으로 거칠게 추상화시켜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이다’와 무수한 ‘있다’로 구성된 그 ‘무엇’이라 말할 수 있다. 가령 현재의 ‘나’는 누구와 누구 사이에서 태어난 ‘이다’와 사는 동안 경험됐거나 경험 중인 ‘있다’의 행위들(집에 있다, 산에 있다, 외국에 있다 등등)을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의 ‘이다’와 무수한 ‘있다’를 벗어날 존재란 없다.
문학 행위란 바로 이 하나의 ‘이다’와 무수한 ‘있다’로 구성된 인간의 제 문제를 언어를 매개해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문학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문학의 하위 장르들은 저마다의 ‘룰’을 지니고 있는데 시문학에서는 이 ‘룰’을 구성요소라 한다. 그러니까 시작 행위는 시의 구성요소인 이미지, 비유, 리듬, 상징, 반어, 알레고리, 역설, 어조, 시점과 거리, 화자, 인유와 패러디, 구성 등을 통해 인간 실존의 제 문제를 간접적 혹은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시에도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시문학처럼 스펙트럼이 넓은 장르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시에 대한 기호와 취향은 얼마든지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좋은 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유종호 평론가)이다. 시의 정의는 시인들 수만큼이나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엘리엇은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말했다.
과학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머스 쿤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 의하면 패러다임은 절대적·객관적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당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기초된 것으로서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이 말은 절대불변의 패러다임은 있을 수 없다는 말로서 시대에 따라 당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가 달라지면 패러다임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패러다임의 역사처럼 좋은 시의 요건도 시대의 부침을 겪는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이전 시대의 패러다임을 추문화시키는 것에서 출발한다. 패러다임은 생성과 소멸의 운명을 겪는다. 이상의 실험시와 김수영의 참여시와 신경림의 민중시와 박노해의 노동시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시에 대한 공준이 있어 그것이 명료하게 주어지고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침하는 패러다임 속에서도 항상성으로 존재해야 하는 시의 조건은 있다. 이를 나는 연암 박지원의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시는 “있었던 세계 그리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과 통찰을 통해서 있어야 할 세계를 전망하고 모색한 것”(‘열하일기’)이어야 한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