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파트 8층에 살면서도 승강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한다. 다이어트 때문이 아니라 승강기 교체 공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주민이 매일 계단을 오르내린다. 20년 넘게 이 아파트에 살면서 이러한 진풍경은 처음 본다. 산을 오를 때 등산객과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듯이 계단에서 주민과 마주치면 인사를 주고받는다. 숨을 거칠게 쉬던 주민들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하루하루 느낀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닌데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 사라진 식욕도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면 밥부터 찾는다. 그래도 살찌지 않는다. 건강이 좋아지는 걸 느끼기에 택배와 배달음식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에도 불만이 생기지 않는다. 앞으로 한 달은 더 승강기 없이 살아야 하는데도 아무도 울상짓지 않는다. 이미 이런 삶에 적응해버린 것이다.
적응은 인간의 본능이다. 승강기가 없는 삶에 적응한 것처럼, 나는 나이가 드는 것에도 적응했다. 서른이 넘으면서부터 내가 몇 살인지 잘 모르겠다. 매년 달라지는 나이가 인지되지 않는다. 나이를 모르니 철없이도 살게 된다. 적응의 나쁜 예시도 있다. 한때 나는 한 선배에게 지속적으로 비난받은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너무나 좋은 선배인데 술만 마시면 그렇게 나를 비난하곤 했었다. 그때 그 선배를 존경하고 있었기에 비난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긍할수록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게 느껴져서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비난에서 벗어났다.
수긍은 곧 적응과도 같다. 과거의 나는 비난에 적응해버린 종이뭉치였다. 지금은 나를 비난하던 선배로부터 벗어나 조언해주는 선배 곁에 있는데, 조언에 녹아들고 빠져들수록 바른길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선가 비난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얼른 도망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비난에는 영양가가 없다. 참된 선배는 후배를 비난·비판하지 않는다. 부드럽고 단호하게 조언해줄 뿐이다.
이원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