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현금 실종 사건’… 언택트 결제 바람

입력 2020-10-17 04:02

프랑스 파리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줄리엔은 일요일 오전마다 계산대 앞에서 주머니를 뒤져 유로화를 꺼내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에는 그런 풍경을 보기 힘들어졌다고 한다. 줄리엔은 “사람들이 이제는 아무 것도 만지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신용카드와 비접촉 결제 이용자의 비중이 훨씬 커졌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시대 일상에서 직접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은 새로운 규범이자 유행이 됐다. 신용카드나 QR코드 등 ‘언택트 결제’가 보편화되면서 현금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각국이 준비해오던 ‘현금 없는 사회’가 팬데믹을 계기로 성큼 다가왔다는 평가다.

감염 공포에 비현금 결제 급증

비현금 결제가 증가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공포 때문이다. 현금은 속성상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기 때문에 바이러스 전파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코로나19가 전파되는 주된 방법은 아니지만 감염자가 접촉한 물체에 바이러스가 남아 타인을 감염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면서 “현금 대신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될 수 있으면 비접촉 결제를 이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코로나19 이후 언택트 결제 비중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비대면 결제 플랫폼 업체인 페이팔의 주가는 올해에만 55% 이상 급등했다. 비자카드는 미국에서 자사 신용카드로 결제된 금액이 전년 대비 100% 이상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에서는 직접 장을 보러 가는 대신 온라인 주문을 선택한 소비자가 4월에만 4000만명에 달했다. 컨설팅업체 맥킨지앤컴퍼니는 “‘현금 왕국’으로 불리는 이탈리아에서조차 온라인 거래가 80% 이상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미 연방준비제도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7명은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우려로 현금 결제를 기피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각국 정부도 현금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카드 도난이나 해킹으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설정할 수 있는 ‘최대 구매 가능 금액 한도’를 20유로에서 50유로 이상으로 올렸다.

금융소외계층 한숨도 깊어져

신용카드와 앱 결제 등 언택트 문화는 바이러스를 상대하는 데 분명 효과적이다. 하지만 노인과 저소득자 등 현금을 주로 사용해온 계층은 불편을 겪을 수 있다. 미 소비자행동연대는 “은행 계좌가 없거나 디지털 결제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 세대 등 금융소외계층은 이 같은 유행에서 피해를 입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준 조사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미국 성인 4명 중 1명은 은행 계좌 없이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수 인종이거나 저소득층, 저학력자일수록 이런 비율은 더 높다. 세계경제포럼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은행 계좌를 보유하지 않은 흑인 비율은 백인의 6.5배에 달한다.

미국에서 현금 결제는 모든 결제 중 4분의 1을 차지한다. 특히 10달러 미만 거래의 경우 현금결제 비중이 절반에 육박했다. 저소득층일수록 현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언택트 결제를 확산시키는 한편 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금융소외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현금 결제를 거부할 수 없도록 법제화에 나서고 있다. 뉴욕시는 오는 11월 19일부터 상점과 음식점에 현금 결제를 의무화하도록 조치했다. 현금결제를 거부하다 적발되면 최대 1000달러의 벌금이 부과되고 이후 재차 적발될 때마다 벌금이 가산돼 최대 1500달러까지 올라간다.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 필라델피아 등에서는 이미 유사 법안이 통과돼 시행 중이다.

소비자행동연대의 린다 셰리 국장은 “이 같은 법적 강제 조치는 금융소외계층이 삶을 꾸려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생필품을 구매하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용량 줄지만 현금 여전히 중요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후에도 지금과 같은 언택트 결제 열풍이 지속될지는 불분명하다. 영국 보안기업 G4S가 펴낸 ‘세계현금보고서’에 따르면 팬데믹 이전인 2018년 유럽에서 한 해 동안 발생한 거래의 79%는 현금이 차지했다. 거래액 규모로 계산해도 54%에 달한다. 카드 사용률이 높다고 평가되는 북아메리카 지역에서도 거래 3건 중 1건은 현금으로 이뤄졌다.

마크 구드 연준 샌프란시스코 지점장은 “다양한 결제 수단 중에서 현금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면서 “당장 현금 사용량이 줄었다고 해도 편의점 등 일상적인 소액 결제 상황에서는 유용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 입장에서도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언택트 결제를 유도하는 게 손해가 될 수 있다. 현금 구매 고객들을 돌려보내는 셈이기 때문이다.

국제통화협회의 볼프람 시데만 박사는 “과도한 비현금성 결제 유도는 공포와 걱정에 기반한 위험한 정책”이라며 “현금은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데 있어 큰 가치를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이어 “팬데믹 이후에는 예전처럼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현금이 쓰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