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역자들과 함께 진보장학회를 설립해 지원을 이어갔다. 교육생들은 검정고시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하는 등 기쁨을 안겨줬다. 전원 합격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 해도 있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작업복 차림의 낯선 청년 한 명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출소한 지 1년 된 그는 대형 화물 트럭 운전사로 일하고 있는데 “집사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어서 만나러 왔다”고 했다. 내 도움으로 한글을 깨우쳤고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에도 합격해 운전면허시험까지 치를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하루는 젊은 내외가 찾아왔다. 2년 전 출소한 교육생이었다. 낮에는 달걀 장사를 하고 밤에는 신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공부해서 어디다 써먹겠느냐며 여러 번 포기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좌절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던 우리 내외의 사랑 앞에 눈물을 머금고 위기를 극복했다고 했다. 나는 그들 부부의 밝고 아름다운 생각에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김형태(가명·40)씨는 교육생들의 영어를 개인지도 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출소 후 우리 집에서 앞날을 걱정하며 며칠을 지냈다. 마침 서울에 있는 A학원에서 총무 겸 학원 관리인을 구한다는 소식에 취직을 시켜줬다.
그는 학원에서 틈나는 대로 강의를 청강했고 강사들로부터 영어 실력을 인정받았다. 어느 날 영어 강사가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휴강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자 학원장은 그에게 대타로 강의를 해보라고 했다. 특유의 능변과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 그는 수강생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어엿한 학원 강사가 된 그는 150만원의 월급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휴일에는 청송까지 내려와 교육생들에게 노트와 볼펜, 교재 등을 구매해 주고 영어 특강도 했다. 그는 후배 교육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나이 40입니다. 이 나이에 공부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싶었지만, 슬기롭게 잘 극복해 오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포기하지 마시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그의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우리 내외에겐 그날처럼 기쁜 날이 없었다. 한때 나는 청송감호소를 드나들며 ‘이 끝없는 전쟁은 언제 끝날 것인가’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이 과연 보람 있는 일일까’ 하는 의심과 회의가 종종 들었다. 특별히 믿었던 형제들이 다시 교도소에 들어와 얼굴을 내밀며 “집사님, 죄송합니다” “형님 또 들어왔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일 때 심한 좌절감을 느끼며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 이 일을 꼭 해야만 합니까. 정말 이 일이 가치 있는 일입니까.”
힘들고 어려운 섬김과 희생의 길이지만, 감동적인 변화의 열매들이 있었기에 낙심하지 않고 보람을 느끼며 이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