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성도의 행복

입력 2020-10-13 03:08

헌법에 ‘행복추구권’이 나옵니다. 헌법상의 권리 이전에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우리가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간단한 것처럼 보여도 행복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습니다. 상식적인 생각은 당사자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의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행복감 비슷한 것을 마약 투약자가 경험하지만 우리는 그가 행복한 삶을 산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행복에는 행복감이라는 주관적 요소 이외에 ‘좋은 삶’과 같은 객관적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했을 때 행복은 객관적 요소가 강조된 개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맹목성, 일시성, 변덕 등이 주관적 요소의 문제라면 행복이 그 향유자의 느낌과 별개일 수 있다는 비상식은 객관적 요소의 문제입니다. 이런 인식의 상황에서 행복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둘다 고려하는 것입니다.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가 함께 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을 이와 같은 이해와 연결해 행복한 성도로 살아가기 위한 신앙적 지혜를 모색해 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의 객관적 요소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창 1: 4) 삶입니다. 그중에서 근본은 오늘 본문에 언급된 신령한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는 우리 성도의 인생입니다. 행복한 성도는 우리에게 주신 이러한 은총을 망각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신령한 복에 상응하는 행복감을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그리고 믿음이 식어서 그렇다고 자책합니다. 아닙니다. 느낌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습니다. 소위 ‘은혜를 받고’ 시간이 지난 뒤를 생각해보십시오. 행복감은 점점 둔해지기 마련이고 일시적이며, 당면한 다른 감정이나 상황에 민감한 영향을 받습니다. 행복의 주관적 요소를 절대시하지 마십시오. 한 요소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때 성도들은 신앙적 행복의 객관적 요소인 신령한 복에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행복의 객관적 요소는 행복감이 결핍돼도 행복을 유지하게 하는 기둥입니다.

둘째 성경은 행복의 주관적 요소 또한 중시하고 있습니다. 서은국 교수(연세대)는 “행복은 강도(强度)가 아니라 빈도(頻度)”라고 합니다. 심리학적 접근이므로 여기에 언급된 행복은 행복감 즉 주관적 요소를 뜻합니다. 인간의 신체는 즐거움 같은 행복감이 오래가지 않게 만들어졌으니 행복감을 수시로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이미 적용된 이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 16~18).” 실천적 수준에서 이 말씀은 성도들은 하루를 살아가면서 빈번(頻繁)하게 신앙적 행복감을 가져야 한다는 당부입니다. 감사 훈련하는 곳에서 매일 감사의 이유 100가지를 적게 하는 것도 행복감의 빈도를 높이는 과정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복의 주관적 요소가 우리 삶 속에 잘 작동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끝으로 성도의 행복론에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저희들 그런대로(reasonably) 행복하게 하시고 다음 세계에서는 주님과 함께하는 최고의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하옵소서.” 성도는 이 세상의 행복을 무시하지 않지만 이곳의 행복을 최고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러한 행복론 때문에 우리 성도들에게는 행복강박증이 없습니다. 자족과 여유를 누립니다. 신앙적 행복의 대전제와 객관적 주관적 요소를 꾸준히 체화시켜 행복한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솔문 임실전원교회 목사

◇임실전원교회 기지(基地)는 섬진강 상류 강둑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강(겔 47: 12) 작은 지류를 이루고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기 위해 협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