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 스마트폰 제조 업체 카메라 담당 임원에게 ‘좋은 카메라’의 정의에 관해 물었다. 그는 “날릴 건 날리고 살릴 건 살리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잡티는 없애고, 피부는 뽀얗게 만들면서 눈은 선명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물보다 ‘뽀샤시’하게 만들어야 ‘잘 나온 사진’으로 평가받고, 특히 셀피를 즐기는 2030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최근 몇 년간 스마트폰 카메라는 사실적인 사진보다 보정을 과하게 해서라도 사용자가 만족하는 사진을 얻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뷰티 필터 없이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시대다. 민낯으로 찍어도 인공지능(AI) 기술까지 동원해 자연스럽게 화장한 모습으로 바꿔주기도 한다. 인스타그램 등 SNS에 미남미녀가 많은 이유도 필터가 활성화했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필터든 뭐든 기술을 사용해 자신이 만족스러운 사진을 찍으면 된 거 아닌가 싶은데, 문제가 있다. 필터를 사용하면 정신 건강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구글이 4개국 전문가들과 함께 연구한 결과 필터 사용이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80%는 자녀의 필터 사용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10대 사용자의 3분의 2는 셀피 때문에 주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필터로 보정된 사진이 성장기 청소년에게 자신의 외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셀피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SNS로 공유돼 평가를 받게 되는 운명이기도 하다. 자신의 멋진 모습을 남에게 과시하고 싶은 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다. 하지만 세상의 평가는 야박할 때가 많다. 셀피가 실물보다 나으면 ‘사진발’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셀피가 별로면 필터를 먹여도 이것밖에 안 되냐고 공격의 대상이 되는 현실이다. 구글은 이런 폐해 때문에 픽셀 스마트폰에서 필터 기능을 지양하라고 권고하고 나섰다. 구글이 만드는 픽셀 스마트폰에서는 필터를 끈 채로 출시한다고 밝혔다. 사용자가 설정에서 필터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권장하진 않겠다는 것이다.
선천성 희소 질환을 가진 멜리사 블레이크는 SNS의 외모지상주의에 맞선 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질환 탓에 남과 다른 외모를 가진 이는 외모에 대한 조롱에 시달려 왔다. “너무 못생겨서 셀피를 못 하게 해야 한다”는 공격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는 대신 매일 셀피를 찍어 SNS에 올렸다. 벌써 1년째다. 인스타그램 팔로어 21만명이 넘는 블레이크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아름다움은 나를 가치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구글이 단순히 미(美)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기 위해 ‘필터 유해론’을 펼치는 건 아닌 거 같다. 구글에 가장 중요한 건 사용자 데이터다. 전 세계에서 끌어모은 데이터는 구글이 AI를 고도화하고 사업을 확대하는 데 밑바탕이 된다. 그런데 필터를 쓰면 사진 데이터가 오염될 것이라고 구글이 걱정하는 것 같다. 구글에 따르면 클라우드 서비스 ‘구글포토’에 올라오는 사진 중 240억장 이상이 셀피다. 셀피는 얼굴 인식 기술을 고도화할 수 있는 중요한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가 필터에 의해 왜곡되면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된다. 전 세계 인구가 60억명이면 얼굴 데이터도 60억개인데 필터가 몇 가지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보정을 하면 엇비슷한 얼굴 데이터가 많아질 수 있다. 구글로선 공부할 자료가 줄어드는 것이다. 앞으로 얼굴 인식 기술은 결제와 보안 분야 등에서 다양하게 사용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김준엽 온라인뉴스부 차장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