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화재, 매뉴얼 따라 신속 대응… 불덩이 속 ‘사망 0’ 기적

입력 2020-10-09 19:04
소방 사다리차가 닿지 못한 울산 남구 주상복합아파트 고층부는 9일 오전까지 화염이 가라앉지 않았다. 소방 헬기가 투입된 뒤에도 강한 바람 탓에 불길이 한동안 잡히지 않았다. 연합뉴스

12층에서 목격된 불은 건물 외벽을 타고 삽시간에 꼭대기 33층까지 올라갔다. 태풍 찬홈의 강풍이 키운 불길에 울산 남구 삼환아르누보 주상복합아파트가 통째로 뒤덮였다. 8일 밤 11시7분 시작돼 15시간40여분이 지난 9일 오후 2시50분에야 완전히 꺼졌다. 127가구 고층아파트가 불덩이로 변했는데,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신속한 구조와 침착한 대피가 인명피해를 막았다.

강풍주의보가 발령돼 고층건물 주변 빌딩풍이 심해진 날이었다. 거센 바람은 12층 에어컨 실외기 쪽에 있던 불티를 몇 개 층씩 건너뛰며 아파트 위아래로 옮겨댔다. 거실로 침실로 연기가 스며들고, 펑펑 소리를 내면서 창문이 깨졌다. 스프링클러가 작동했지만 물이 부족했다. 급속히 번진 불에 많은 스프링클러가 한꺼번에 가동되자 옥상 수조 물이 고갈되며 기능을 잃었다.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맨발로 뛰어나온 사람, 물에 적신 수건을 입에 대고 탈출한 사람들이 건물 앞에 모여들었다. 미처 나오지 못한 이들은 15층, 28층에 마련된 피난 공간과 옥상으로 피했다.

9일 새벽 건물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 모습. 연합뉴스

소방대는 “연기가 난다” “타는 냄새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5분 만에 도착했다. 곧장 내부로 진입해 구조에 나섰다. 본격 확산 전에 출동해 신속한 판단이 이뤄졌고, 곧 인근 소방인력을 총동원하는 ‘대응 2단계’가 발령됐다. 하지만 전국에 10대뿐인 고층 화재용 ‘70m 사다리차’가 울산에 없었다. 이 아파트 높이는 113m다. 대원들은 집집마다 들어가 진화와 구조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피난 공간과 옥상에 있던 주민 77명은 소방관들에 의해 안전하게 구조됐다. 33층에서 연기가 자욱한 집에 1시간 넘게 갇혀 있던 일가족 3명은 거의 마지막으로 나왔다. 28층 피난 공간에서 안내하던 소방관들이 뛰어올라가 쓰러지기 직전의 일가족을 업고 1층까지 내려왔다.

2시간30분 만에 큰 불길이 잡히는 듯했지만 깨진 창문으로 강풍이 몰아쳐 불씨가 되살아나기를 반복했다. 창문을 통해 화염이 뿜어져 나와 다시 외벽에 불길이 번지는 상황이 아침까지 계속됐다. 부산의 고가사다리차를 급히 가져오고, 소방헬기 4대를 띄우고서야 완진됐다. 소방인력 1300여명, 장비 148대가 동원됐다. 대원 1명과 주민 92명이 병원에 이송됐다. 89명이 단순히 연기를 마시거나 찰과상을 입었고, 중상자는 3명이다.

화재가 커지고 장시간 이어진 건 건물 외장재인 알루미늄 복합패널 속에서 숨바꼭질하는 불씨 때문이었다. 이 패널 내부로 불씨가 번지면 샌드위치 패널 못지않게 위험하다. 알루미늄은 일반 철제보다 녹는점이 낮고, 패널 사이의 심재도 폴리에틸렌 등 가연성인 경우가 많다. 이용재 경민대 소방안전관리학과 교수는 “샌드위치패널을 얇게 압축한 것으로 보면 된다. 2010년 부산 우신골든스위트 화재 때도 알루미늄 복합패널이었고 지금처럼 건물 외벽 위주로 탔다. 부산 화재 전에는 외장재 규정이 전무했다. 이후 알루미늄 복합패널 사용이 까다로워졌는데, 삼환아르누보도 2009년 준공된 것”이라고 말했다.

울산=안창한, 이택현 기자 chang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