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에 다니는 40대 직장인 A씨는 20년을 근속했다. 그는 자신의 ‘노동 성적표’를 알고 싶었다.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연도별 소득금액증명원을 뽑아 20년 치를 모두 더해봤다. 10억원이 채 되지 않았다. A씨는 3년 전 아끼고 아꼈던 청약통장을 써서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았다. 이 아파트는 최근 몇 개월 새 부동산 가격 폭등에 힘입어 분양가 대비 10억원이 올랐다. A씨가 20년 동안 땀 흘려 번 근로소득보다 단 한 번의 부동산 투자로 인한 불로소득이 더 많은 셈이다. A씨는 갑자기 허탈해졌다. ‘20년 동안 왜 이렇게 아등바등 일에 치여 살았을까.’
불로소득이란 노동의 대가로 얻는 임금이나 보수 이외에 벌어들이는 모든 소득을 말한다. 부동산, 주식 등이 대표적이다. 불로소득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다. 부동산 투기나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주식투자 등 불법행위만 없다면 정당한 소득이다. 그러나 불로소득은 근로소득보다 부의 불평등 현상이 심하다. 일부 부동산 자산가에게는 부동산 가격 급등이 소득 증가로 이어지지만, 근로소득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상당수 국민에게는 전월세 가격이 오르면서 주거비용 증가로 나타난다.
현 정부는 출범하면서 경제정책 근간으로 소득주도 성장론을 내세웠다. 근로자가 땀 흘린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게 하고, 이를 통해 건강한 가계를 만들어 소비와 생산을 늘려나가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소득주도 성장은 ‘불로소득주도 성장’으로 변질됐다. 올 2분기 통계청 가계동향 조사를 보면 전국 2인 이상 가구의 월 평균 근로소득은 322만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만원(5.3%) 감소했다. 관련 통계가 작성된 2003년 이후 최악이다. 특히 저소득층의 근로소득 감소 폭이 컸다. 소득 하위 20%의 근로소득은 1년 새 18%나 줄었다. 줄어든 저소득층의 소득을 정부가 재정으로 메워주고 있지만 재정이 이를 마냥 감당할 순 없는 노릇이다. 반면 불로소득은 부동산과 증시 활황으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국세청의 부동산 양도차익 통계에 따르면 2014년 50조원이던 양도차익은 2018년 75조원으로 불어났다. 신용대출을 통해 주식에 투자하는 청춘들도 많아졌다.
정부가 강조했던 소득주도 성장이 이처럼 망가진 이유는 뭘까. 코로나19 등 예상치 못한 악재 탓도 있지만 정책 실패가 주 원인이다.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고 23차례 대책을 냈지만 오히려 서울 강남과 세종을 중심으로 폭등하고 있다. 전월세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 시행 후 전세 매물이 사라지고 가격은 급등하면서 세입자들이 오히려 피해를 본 경우가 많아졌다. 정부는 또 ‘동학개미’들의 압력에 금융투자소득 과세를 1년간 유예했고, 양도소득세 대주주 요건 3억원 인하 방안도 재검토에 들어갔다. 투기와 편법 속에 불어나고 있는 불로소득을 어떻게 제어할지에 대한 정책은 실패한 셈이다.
불로소득의 주 원천인 부동산과 주식이 지금처럼 마냥 치솟는다면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A씨 같은 성공 사례가 늘어만 간다면 정부의 불로소득주도 성장도 그리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산 거품은 언젠가는 꺼지게 마련이다. 현재의 부동산과 증시 활황은 빚으로 쌓은 바벨탑과 같은 형국이다. 만약 자산가격이 폭락하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해서 부동산과 증시에 빚투자한 2030세대는 회복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들에게 증시와 부동산 시장만이 있는 게 아니라 노동 시장에서 정당한 대가만으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 정부가 이제라도 소득주도 성장을 성공시키고 싶다면 이를 뒷받침할 일자리 정책 등을 만들어야 한다. 거품이 꺼지면 늦는다.
이성규 경제부 차장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