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전기 나간 날

입력 2020-10-09 04:07

냉장고를 여니 한숨부터 나온다. 추석 상다리가 부러지느냐 마느냐가 전통의 증거인 양 매달린 흔적. 이 음식의 산을 어쩔 것인가. 기아와 살상의 공포에 맞서 생존해온 것이 인류이기도 하거니와,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역사 때문에 식량에 대한 공포가 더 극대화됐다고 애써 이해해보려 해도 마음이 영 불편하다. 우리 사회 어딘가에선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지만, 대다수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다 보니 명절이나 행사 뒤 으레 남는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 골칫거리가 되기 일쑤다. 결국 이것들은 냉동실의 화석이 되거나, 소분할 겨를도 없이 냉장고를 잠시 거쳐 음식물 쓰레기로 전락한다.

우리 집 냉장고도 역시나 이런 흔적이 거대하게 쌓여 있었다. 이 어이없는 장면에 헛웃음만 나오다 차디찬 음식에 온기라도 불어넣고자 몇몇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냉장고 음식들은 그 버려진 처지 때문인지 맛을 되돌리기가 영 어려워서 전자레인지라는 심폐소생기라도 써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윙윙 돌아가던 전자레인지가 별안간 뚝 하고 전원이 나갔다. 한숨만 나오게 하던 냉장고 안 풍경도 이제는 아예 암흑에 싸였다. TV, 인터넷 전원은 물론 전등까지 끊기자 완벽한 정적이 찾아왔다. 부랴부랴 두꺼비집을 살펴보고 쉬이 고쳐질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닫자, 시시각각 녹아 그야말로 거대한 음식쓰레기가 될 냉장고 안이 떠올라 식은땀마저 났다.

다행히 바로 와줄 수 있는 전기 업체를 찾아 우려하던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고, 꺼내놨던 나물들을 한데 섞어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며 생각했다. 전기 하나가 우리에게 선사해주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 그리고 왜인지 냉장고 역시 저 엄청난 음식을 보관하느라 지쳤던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든다. 이런 걸 보니 지구를 구한다는 거창한 이유보다도 냉장고의 과로부터 막기 위해 아무래도 다음 명절에는 음식을 더 줄여야겠다.

배승민 의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