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인권규범 발전의 기반을 제시한 1948년 세계인권선언, 보편적 국제인권규범인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자유권 규약),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 규약) 등 주요 국제인권규약에는 남녀 양성을 의미하는 ‘성별’(sex)의 용어만 사용됐다. 사회적으로 구축된 성인 젠더(gender) 개념, 이에 기반을 둔 성정체성(gender identity), 동성애·양성애·성전환자를 포함하는 성적지향(sexual orientation)이라는 용어는 단 한 군데도 사용돼 있지 않다. 필자는 현재 한국이 가입·비준한 국제조약 어느 곳에도 명문의 규정으로 성적지향, 성정체성이 언급된 것은 없다고 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적 지향, 성정체성에 따른 차별 금지가 널리 퍼진 국제관습이나 법적 확신이 요구되는 국제관습법으로 인정될 리는 만무하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도입한 국가 수는 190여개 유엔 회원국의 20%를 넘지 않는 30여개 국에 불과하다.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성정체성을 수용하고, 남녀 외 제3의 성을 인정하는 국가의 수는 10% 미만이다. 다양한 가족 개념을 법으로 수용해 동성 간 결혼을 국내법으로 수용한 국가도 20개국 정도다. 동성애 차별금지법이나 동성결혼 법제화에 대한 국제관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녀 간 결혼과 일부일처에 기초한 가족제도가 유엔 회원국의 60~80%에서 수용돼 널리 퍼진 국제관습이라 할 수 있다.
국제사회에 스며든 젠더 이데올로기
구소련의 해체, 동유럽의 체제전환 등 냉전 종식 과정에서 인권이 국제사회의 주된 쟁점으로 등장했다. 1993년 오스트리아 빈의 제2차 세계인권회의에서 ‘행동강령’으로 여성에 대한 성폭력 대신 ‘젠더 폭력’이라는 개념이 ‘여성차별금지’와 함께 사용됐다. 1995년 중국 베이징 세계여성대회에서는 생물학적 성별 대신 사회적 성(gender), ‘젠더’라는 개념이 공식적으로 채택됐다. 이는 당시 세계의 어느 국가 간 조약에도 명시되지 않았던 성적지향, 성정체성에 대한 차별금지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 젠더 폭력은 생물학적 양성을 넘어선 동성애자 등 다양한 사회적 성에 대한 폭력, 나아가 일체의 차별을 차단해야 한다는 취지로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젠더 폭력, 젠더 차별금지의 수용에 동의한 이들도 언어적 차별, 정신적 괴롭힘에서 나아가 공개적 반대, 종교적·윤리적 신념에 따른 거절까지 포함하는 ‘반대·거절의 자유’ ‘표현의 자유’의 제약으로 이어지는 젠더 전체주의적 양상을 예측하진 못했을 것이다.
개념 도입이 성공한 후, 빈 행동 강령에 따라 각국에 인권기구를 설립하도록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설립된 인권기구들이 국제법적 근거가 불분명했던 성적지향, 성정체성에 대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개별 국가에 압박했다. 한국의 경우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성적 지향이 들어간 후 2007년 포괄적 차별금지법안 제정을 시도한 것이 그 예다.
구속력 없는 권고와 결의에 우선하는 국민 주권 행사
1993년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유권 규약 이행감시기구인 규약위원회에서 남성 간 성행위를 형벌로 처벌토록 한 호주의 한 주 형법에 대해 평등규정 위반이라며 폐지를 권고했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2011년, 2014년, 2016년 세 차례 성적지향, 성정체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금지를 결의했다. 하지만 소규모 전문가단의 의견, 국제법적 구속력이 없는 인권이사회의 결의는 개별 국가들이 그 사정에 따라 이를 수용 또는 거부할 수 있다. 한국 대법원, 헌법재판소도 유엔총회나 하부기구의 결의의 법적 구속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권이사회(HRC)는 2010년대 초·중반 미국 오바마 행정부와 당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후원 아래 세 차례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금지를 결의했으나 2016년을 마지막으로 유엔 인권이사회는 더는 이런 결의를 내지 않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더는 젠더 차별금지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필자는 기존 결의에 찬성하지 않는, 즉 동성애, 성별전환의 수용에 동의하지 않는 국가들의 수가 지속해서 증가 추세에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고 본다.
국제조약과 같이 법적 구속력이 있으면 개별 국가의 입법 주권의 제약이 정당화될 수 있겠으나, 전체주의 국가도 아닌 민주국가에서 주권은 국민의 자기 결정권 행사로 개별국가 내 공유된 가치에 기반을 둔 공동체의 결정 또는 입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존중되는 것이 국제법상 인정된다. 주권 행사 결과로서의 입법은 국제인권법에 위반되지 않는 한도에서 보호될 필요가 있다. 문화적·종교적 가치와 충돌하며 갈등 속에 있는 부분을 차별금지 사유라며 구속력 없는 권고를 하거나, 결의에 근거해 국가 주권 행사를 제약하려는 것은 주권 침해에 해당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가입 비준한 국제조약상 인권 또는 국제관습법상 인권이 아닌 다른 권리의 경우,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국제 기준 운운하며 국가 주권의 유보를 요구하는 것은 국제법상 부당한 주권 침해가 될 수 있다. 인권과 국가 주권의 균형을 도모해야 함을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