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스가 현대영어로 쉽게 쓴 신약, 한글본 출판에 부쳐

입력 2020-10-09 03:05

영어권에서 널리 읽히는 신약성경 번역본 가운데 JB 필립스의 신약성경이 있다. 필립스는 1906년 영국 남동쪽 서리에서 태어나 1982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런던에서 목회했다. 이때 교회 젊은이들이 킹 제임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 보고 놀랐다. 쉬운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겠다고 결심한 계기다. 독일이 폭격기로 영국을 무차별 공격하던 런던 공습(1941~42) 기간 중 방공호에서 골로새서를 현대 영어로 번역하며 그의 신약성경 번역이 시작됐다. 참 대단한 결심이고 헌신이다. 젊은이들의 호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종전 후 필립스는 계속해 번역에 헌신한다. 마침내 58년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해 출판했고 72년 개정판이 나왔다.

필립스는 번역의 근본원칙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번역한 것처럼 보이지 않아야 한다. 둘째, 번역자가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 방향으로 작업해야 한다. 셋째, 원저자의 글이 주는 것과 같은 인상을 번역서 독자의 머리와 가슴에도 전달해야 한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필립스의 영어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할까. 평소 종종 참조했던 필립스의 신약성경이 한글로 번역된다는 소식에 기뻤지만, 동시에 약간의 머뭇거림도 있었다. 필립스의 번역 원칙에 따라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을까 하는 기우 때문이다. 나 역시 평생 성경번역자로 살았고 ‘쉬운 성경’의 ‘시편’을 번역했기에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최근 받아본 ‘필립스의 신약성경’ 전권 번역본은 내 기우를 일순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한글로 탁월하게 번역한 번역자에게 감사와 애정을 담은 기립박수를 보낸다. 제1권은 4복음서를 담고 있는데 김명희 선생이 수고했다. 연세대 영문학과를 졸업해 IVP에서 일했으며, 지금은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한다. 제2권은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담겨 있는데 사도행전은 김명희 선생이, 나머지는 송동민 선생이 번역했다. 송동민 선생도 연세대에서 영문학과 중문학을 공부하고 백석대 대학원과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제자이기에 더욱 반갑다.

두 사람은 단순히 번역자의 일이 아니라 필립스와 대등한 일을 해냈다. 가정마다 장만해 가정예배 때나 개인 경건 시간에, 그룹 성경공부 때 사용하면 좋으리라. 경건 생활은 성경을 읽는 것에서 출발한다.

설교자나 목회자, 신학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설교하기 위해 성경을 읽지 말고, 성경을 읽고 설교해야 한다. 이 순서를 잊지 말자. 성경을 읽되 제발 덮어놓고 읽지 말고 열어놓고 읽자. 베뢰아 사람이 정말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詳考)했듯 말이다.(행 17:11)

류호준 목사(전 백석대 신학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