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에서 나는 동물병원을 개업했다. 공수의사로도 일했다. 공수의사는 군의 가축 방역을 맡아 가축 질병 검진이나 전염병 예방백신 접종, 구제역 차단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나는 소와 돼지를 도살할 때 검사하는 일을 맡았다.
한 번은 동업자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죄명은 뇌물수수. 당시 국가에서는 무료검사를 시행했다. 군 축산계는 이와 달리 개업한 수의사들이 동물 도살 검사에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는 것을 참작해 검사비로 소는 5000원, 돼지는 3000원씩 징수할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검사비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동업자가 나를 고발했다. 구속당한 나를 위해 아내는 동분서주했다. 청송군뿐 아니라 경북의 각 군에서도 일정한 검사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검사에게 알렸다. 아내의 노력에 나는 석방될 수 있었다.
1982년 8월을 나는 잊지 못한다. 또다시 큰 빚을 졌다. 2개월 안에 그 많은 부채를 해결하지 못하면 가족들과 길바닥에 나앉아야 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나는 절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주님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서원이 담긴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었을까. 절대 해결될 수 없을 것 같던 큰 빚을 주변의 도움으로 하루아침에 해결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 제 인생을 걸고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금식하면서 기도하던 어느 주일이었다. 청송교도소 제1감호소 복지 담당 지정수 주임이 대뜸 나를 찾아와 마태복음 25장 31~40절을 읽어보라고 했다.
“김신웅 집사님, 천국에 가시면 이 말씀을 갖고 심판하실 터인데 집사님은 어떤 대답을 하실 수 있습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그의 말이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지 주임를 찾아가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지 주임은 이렇게 말했다. “감호생들 중에 검정고시를 공부하는 45명의 교육생이 있는데, 한 사람당 2500원씩만 지원해주시면 한 달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작은 가축병원을 경영하는 수의사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그래도 내일부터 이행하겠노라고 약속한 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다. 평소 궁핍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던 아내였지만, 이번엔 달랐다.
“당신은 혼자 몸이 아니라 나와 딸 둘이 함께 생활하는 한 집의 가장이에요. 이 신문도 못 봤어요.” 그러면서 조선일보 사회면을 펼쳤다. 죄수가 출소하자마자 자신을 보살펴주고 친하게 지낸 교도관의 집을 찾아가 일가족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내용이었다.
아내는 그들을 돕다가 오히려 큰 불행을 자초할 수 있으니 제발 이 일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래도 이 일을 감행한다면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