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탄다는 건 자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서퍼들에게 서핑은 레저 스포츠를 넘어서 삶의 태도나 문화로 받아들여진다. 서핑을 떠올리면 파도의 정점에서 서프보드를 타고 화려하게 내려오는 장면만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서핑은 파도에 맞서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야 한다. 타고 싶은 파도를 기다리는 일은 파도에 순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된다. 서퍼들은 파도에 순응하는 방법을 단련하면서 자연이 자신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한다고 말한다.
서핑의 시작은 파도를 찾는 것부터다. 그래서 서퍼들은 사계절을 따라 강원도 양양, 제주 중문, 서해의 만리포 등을 떠돌며 좋은 파도를 찾아다닌다. 파도가 계절마다 달라지는 해류와 바람이 만나 만들어지기 때문에 계절에 따라 좋은 파도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바뀐다.
‘서핑의 성지’로 떠오른 양양에서는 가을과 겨울에 가장 좋은 파도를 만날 수 있다. 북동쪽으로 들어오는 동해의 큰 해류와 편서풍이 만나서 파도가 높지만 동시에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파도와 바람이 정면으로 부딪쳐 만들어내는 ‘오프쇼어(off-shore)’는 서핑에 최적이다. 여기에 여름철에 데워진 해수온 덕분에 물 밖 기온보다 바다 안이 따뜻한 경험을 준다. 반대로 제주와 부산은 봄 여름에 만나는 파도가 더 좋다. 남서쪽에서 올라오는 해류 덕분이다.
서핑은 파도와 하나가 돼가는 과정
자신에게 알맞은 파도를 찾았다면 서퍼는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야 한다. 파도가 잔잔해지는 ‘라인업(line-up)’ 구간까지 서프보드를 타고 나가야 하는데, 초심자의 경우 해변으로 들이닥치는 파도를 넘어서 라인업에 도달하기까지 균형을 잃고 물에 빠지기 일쑤다.
라인업에 도달하면 서퍼들은 파도를 고르고 파도를 향해 바삐 저어간다. 파도의 큰 힘으로 만들어지는 바다의 경사면에 몸이 실리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스노보드를 타듯 해수면을 미끄러져 내려온다. 균형을 잃고 물속으로 고꾸라지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파도와 하나가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끼게 해준다.
‘인생의 파도’라는 표현도 있지만 자신의 삶을 서핑에 비유하는 서퍼들이 많다. 서핑으로 거친 바다에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특히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사태의 장기화 속에 서퍼들은 서핑을 통해 지치지 않고 앞으로 나갈 힘을 얻고 있다.
서핑에 빠져 양양에 7년째 살고있는 채화경(35)씨는 “서핑으로 삶을 좀 더 자연스럽게 살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라며 “처음 서핑을 배울 때 누군가 ‘서핑을 하면 삶이 바뀐다’고 하는 말에 실소를 터뜨렸는데, 지금 제가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파도를 잘 타기 위해 다른 서퍼들과 경쟁하다가도 하늘을 보면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낀다”며 “나이가 들고 나를 되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서핑을 하면서 자연과 맞물려 나를 온전히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서핑, 아들딸에게 물려주고 싶은 문화
한국에서의 서핑은 이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대한서핑협회는 지난 7월 30일 다음 해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대한체육회 준회원 자격을 얻었다. 송민 대한서핑협회 이사는 “서핑이 ‘치기 어린’ 젊은 스포츠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아들딸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문화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추어 대회로 명맥을 이어오던 서핑대회도 한국서프리그(KSL) 주관으로 오는 15일 ‘만리포서핑챔피언십’을 개최할 예정이다. 아직은 체계적인 훈련보다는 선수 개인의 역량에 의지하고 있는 현실을 점점 극복해 나가고 있는 모양새다.
지난해 국가대표 1위로 선발된 임수정(25)은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의 입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양양에서 만난 임수정은 6일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국제 대회에서 외국 선수들을 만날 때마다 새로움을 느끼고 배운다”며 “제가 못한다는 생각이 커지면 자기 동력이 줄어든다. 외국 선수들에 자극을 받지만 결국 제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할 때 더 잘할 수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걸 쏟아놓고 탈진하는 것보다는 서핑을 오랫동안 즐기고 싶다”며 “한계를 깨는 것도 강도 높은 훈련으로 몸을 망가뜨리는 것보다 몸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훈련을 통해 더 오래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서핑은 그렇게 큰 힘이 필요하지 않다”며 “파도의 힘에 손발을 맞출 수 있으면 파도가 나를 끌어올려 준다. 정말 멋진 서퍼는 파도와 하나가 돼 정말 아름다운 파도가 된다”고 말했다.
자연이 삶이 된 서퍼들
자연을 온몸으로 체감한 서퍼들은 소중한 파도를 더는 만날 수 없게 될까 걱정한다. 그렇기에 서퍼들은 ‘자연이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환경운동이 서퍼들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서핑을 할 때 플라스틱을 최소 3개 이상을 주워 나오자는 ‘Take 3’는 대표적이다. 김진수 강원도서핑협회 사무국장 “나도 젊을 때 바다에 놀러 가서 쓰레기 버리는 사람이었지만 서핑을 하고부터는 쓰레기를 줍게 됐다”며 “내가 즐기는 바다에서 쓰레기를 주워오는 일이 어렵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등의 영향으로 서핑을 즐길 수 있는 해변이 사라져가는 것은 서퍼들에겐 가장 큰 문제다. 실제로 지금 추세라면 2100년까지 세계 모래 해변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김 사무국장은 “몇 년 사이에 강원도 해변에서도 모래사장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며 “과거 강릉 안목해변은 좋은 파도 덕분에 서퍼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였지만 방파제를 설치한 이후 서핑을 즐길 수 없는 공간이 됐다. 양양 인구해변의 모래사장 침식도 현재진행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서핑을 하며 바다를 걱정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양양=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