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밥상을 한번 떠올려 보자. 집에서 먹었든 외식을 했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의 재료와 조리법을 막연하게나마 짚어보면 빠지지 않는 재료가 하나 등장할 것이다. ‘조미료’다. 여러 조미료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MSG(L-글루탐산나트륨)의 대명사로 쓰여온 ‘미원’이다.
미원은 한국인에게 조미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다. 국산 첫 발효 조미료로 1990년대 초반까지 집집마다 부엌 찬장에서 한 자리 차지하던 생활필수품이었다. 40대 이상이 기억하는 ‘엄마 손맛’에 미원이 ‘한 꼬집’씩은 기여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극과 극의 부침을 겪으며 지난 60여년 한국인의 식문화를 이야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미원은 1956년 처음 개발됐다. 일본의 조미료 아지노모토가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었던 50년대 중반 대상그룹 창업자인 임대홍 회장은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 성분인 ‘글루탐산’의 제조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임 회장은 일본 오사카에서 조미료 제조 공정을 습득하고 56년 부산에 대상그룹의 모태인 동아화성공업을 세웠다. 지금의 종합식품기업 대상그룹이 국내 첫 발효 조미료 미원을 탄생시키며 첫발을 내디딘 때였다.
미원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일본 아지노모토의 명성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미원이 차지했다. 대상그룹 관계자는 “어떤 음식이든 미원을 조금씩 넣으면 맛이 좋아진다는 입소문으로 당시 가정집에서는 미원을 사용 안 한 집이 없었을 정도였다. 미원은 ‘맛의 비밀’, ‘마법의 가루’로 불리며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고 말했다.
독보적인 존재였던 미원에 CJ제일제당이 ‘미풍’으로 도전하면서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미원과 미풍의 경쟁은 정부가 나서서 제재할 만큼 치열했다. 1960년대 미원과 미풍의 사은품 경쟁을 들여다보면 당시의 생활상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식이었다. 미풍의 영업사원들이 무채칼, 고무장갑을 사은품으로 내놓으면 미원은 질세라 비치볼, 미원병을 선물로 증정했다. 미풍이 고급 스웨터를 경품으로 내걸었고 미원은 금반지를 동원했다. 조미료의 사은품이 스웨터와 금반지였다니 지나친 것 아닌가 생각될 수 있으나, 그때는 ‘그럴 만했다’.
당시 미원과 미풍의 사은품 경쟁에 뜻밖의 수혜자는 우체국이었다. 소비자들의 경품 응모 엽서가 폭주하면서 우체국이 어부지리로 돈을 벌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원의 위상은 광고모델로도 확인된다. 68년 당시 최정상 영화배우였던 김지미씨가 국내 최고 모델료를 받으며 전속 계약을 하기도 했다.
미원은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좋았다. 1962년에 처음 나온 ‘미원선물세트’는 무려 1㎏짜리 금색 캔을 포장해서 출시했다. 적잖은 용량의 미원이 인기 선물이었다는 점을 보면 미원이 각 가정의 주방에서 꽤 존재감 있는 조미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원은 출시 후 30여년 동안 성공기만 써 왔다. 동아시아 지역에 수출되면서 조미료 기업으로 입지를 탄탄히 했다. 하지만 90년대 초반 갑작스럽게 위기를 맞았다. 이 위기는 무려 20년 가까이 미원을 침체기로 끌어내렸다.
발단은 한 식품회사의 ‘무첨가물 마케팅’이었다. “화학 합성품 MSG를 넣지 않았다”는 광고가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면서 미원이 직격탄을 맞았다. MSG는 몸에 해로운 화학 첨가물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면서 ‘1가구 1미원’의 시절은 저물었다. 화학물질이라는 오명과 함께 미원은 주방 찬장 구석으로 밀려나게 됐다.
20년 세월이 걸리긴 했으나 2010년대 이후 미원은 오욕을 이겨내고 유용한 조미료로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인체에 해롭지 않다는 연구 결과물들이 전세계에서 나오고 널리 알려지면서다. 미원의 원료인 L-글루탐산나트륨은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발효 첨가물이다. 사탕수수를 발효해 만들었기 때문에 더이상 화학조미료라고 불리지도 않게 됐다. 2018년 1월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식품첨가물 분류에서 ‘화학적 합성 첨가물’이라는 용어를 완전히 삭제했다.
MSG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미국 식품의약국(FDA), EU식품과학위원회에서 각종 독성 실험을 통해 ‘인체에 해를 준다는 증거나 이유가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MSG를 평생 섭취해도 안전하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최근에는 긍정적 기능에 대한 연구도 발표되고 있다. MSG가 나트륨 섭취량을 최대 30%까지 줄여줘 나트륨 저감화에 효과적이라는 연구, MSG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감염에 의한 위 손상으로부터 위점막을 보호한다는 연구 결과 등이 공개됐다.
소비자 인식이 바뀌면서 20~30대 사이에서 MSG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사라졌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에서 이름난 요리 인플루언서들은 미원 활용법, 미원을 넣은 요리 등을 적극 선보이고 있다. 대상 관계자는 “대상은 미원을 활용한 레트로풍 레시피북 ‘미원식당’을 출간하고 젊은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광고 ‘흥미원’을 기획했다”며 “20~30대 소비자에게 미원으로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소통을 넓혀갈 것”이라고 말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