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까지 한 달. 성패는 속도가 가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진보의 아이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의 빈자리를 채울 후임자를 지명한 건 긴즈버그 별세 8일 뒤였다. 록스타를 방불케 한 추모 열기가 불타던 때였다. 임기 말 대통령의 대법관 지명을 두고 여론도 비판적이었다. 트럼프에게는 반전 카드가 절실했다. 비장의 무기는 48세 젊은 판사 에이미 코니 배럿이었다.
낙태부터 이민, 총기, 오바마케어까지 보수 성향을 숨기지 않았던 배럿은 청문회를 거쳐 크리스천 커뮤니티의 아이콘이 된 인물이다. 개인사도 매력적이다. 로스쿨 동창과 결혼해 2명의 아이티 출신 입양아까지 7남매를 키운 워킹맘 배럿은 막내의 다운증후군을 확인하고 출산을 결정한, 확고한 낙태반대론자였다. 중서부 노터데임대학 로스쿨 출신이라는 것도 장점이다. 동부 명문 예일대와 하버드대로 양분된 연방대법원에 입성하는 비(非)아이비리그 출신 여성 법조인 배럿은 남성 엘리트 순혈주의를 깰 적임자로 평가받았다.
관련 보도에는 좌우 막론 찬탄이 넘친다. 배럿은 제7연방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된 뒤 거주지인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에서 시카고 법원까지 왕복 4시간 거리를 출퇴근하며 모교에서 파트타임 강의까지 했다. 그 와중에 아이들 학교에서 자원봉사하고, 생일파티를 열고, 등하교 픽업도 했다. 7명 자녀의 엄마 역할과 법률가의 삶 사이에서 믿기지 않는 균형을 이룬 배럿의 비결은 성실함이라고 했다. 지인들 말로 그녀의 하루는 새벽 4시 체육관에서 시작된다. 배럿의 보수적 법철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녀가 출중한 법 전문가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노력과 헌신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름답지만 단호한 표정의 배럿은 보수층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대가족을 꾸리며 동시에 엘리트 직업인이 되는 건 가능해. 신실한 야심가?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여자들은 열광했다.
배럿의 완벽한 스펙은 민주당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녀를 잘못 공격했다가는 역풍이 불 게 뻔했다. 이미 2017년 청문회에서 한차례 겪은 일이다. 당시 민주당 의원은 배럿을 향해 “종교 도그마가 뿌리 깊이 박혀 있다”고 비판했다가 집중포화를 맞았다. 배럿의 얼굴과 도그마 발언이 새겨진 머그컵과 티셔츠는 불티나게 팔렸다.
최근 배럿이 속한 신앙공동체 ‘찬양의 사람들’을 둘러싼 폭로에도 유사한 반응이 나왔다. 보도에 따르면 이 단체 여성 회원들은 ‘시녀(handmaid) 그룹’에 속해 ‘머리(head) 그룹’ 남성들의 지도를 받으며 활동한다고 했다. 한 칼럼니스트는 “시녀란 단어는 ‘나는 주의 종(handmaid)’이라는 누가복음 속 마리아의 고백에서 나온 것”이라며 “마거릿 애투드 ‘시녀 이야기’에 나오는 여성 출산 기계가 아니다. 그 단어로 배럿을 공격했다가는 반기독교로 낙인찍힌다”고 경고했다. 난공불락. 이 정도면 꿈의 후보다.
불과 며칠 전까지 배럿의 임명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반전은 뜻밖의 장소에서 이뤄졌다. 지난달 26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배럿의 후보지명식이다. 대통령, 상원의원 등 최소 8명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확진자가 쏟아지며 보수의 축하연은 코로나19 슈퍼 전파장으로 전락했다. 배럿의 추락도 한순간이었다. 7명 아이를 마스크 없이 다닥다닥 붙여 앉힌 배럿의 이름은 온라인상에서 코로나19·로즈가든과 짝을 이뤄 무책임한 엄마의 대명사가 됐다.
맹렬한 여성권 옹호자 긴즈버그의 업적을 그만큼이나 빛나는 성취의 주인공이 무력화하는 게 비극적 아이러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트럼프 카드가 최악의 선택이 된 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트럼프 시대에나 구경하는 롤러코스터 대선이다.
이영미 온라인뉴스부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