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설마 그럴 리가

입력 2020-10-05 04:03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 확진자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세계 최고 수준의 대통령 보호 능력을 갖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평소 마스크 착용을 꺼리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속으로 ‘설마 내가 걸리겠나’ 했을 것이다. 이렇게 ‘설마가 사람 잡는’ 상황을 테일 리스크(tail risk·꼬리 위험)라고 부른다. 발생 가능성은 매우 낮은데 한번 발생하면 막대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위험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확진으로 대내외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행정·대선 일정에 차질이 거론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격파가 크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최근 테일 리스크를 언급했다. 연임 이후 첫 번째 가진 기자간담회 자리에서다. 그는 “임기 동안 매진할 일이 코로나19 극복과 테일 리스크에 잘 대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업의 위험 요소로 과잉 부채를 꼽았다. 이미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사태로 셧다운이 이어지면서 많은 기업은 빚으로 연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테일 리스크가 온다면 이미 빚더미에 오른 기업이나 한계에 다다른 기업들은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 저승사자’로 불리는 이 회장의 진단이 무겁게 들리는 건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 경제 주체들의 부채 문제는 이미 심각하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공개한 ‘금융안정 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분기 말 현재 가계·기업의 부채는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206.2%로 집계됐다.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75년 이래 가장 높다. 정부 부채도 올 들어 급증했다. 국가재정운용계획(2020~2024년)에 따르면 올해 국가채무는 846조9000억원으로 GDP 대비 43.9%에 달한다. 1년에 네 차례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한 탓에 급격히 늘었다. 이 같은 추세로 간다면 2022년 국가채무는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2017년(660조2000억원)에 비해 410조원 넘게 불어난다.

헤지펀드의 대부로 불리는 레이 달리오도 최근 과잉 부채에 대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졌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패권을 확보한 미국의 현재 모습을 ‘75세의 제국’으로 비유하면서 “쇠락의 징후가 보인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대영제국의 몰락 역시 막대한 부채에서 비롯됐다면서 이를 막기 위한 최우선 대책으로 대규모 부채 해소를 꼽았다.

많은 경제사학자는 대영제국의 직접적인 몰락 원인으로 국가부채 증가를 꼽는다. 하버드대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 교수는 “1920년대 영국은 정부 지출의 44.5%에 달하는 돈을 이자 비용으로 지불할 만큼 과도한 부채를 안고 있었다”면서 “결국 대영제국은 1945년 이후 외국 금융사에 진 빚이 정부 부채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에 치닫게 되자 제국으로서의 패권을 미국에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패권을 장악했던 미국마저 과잉부채로 망할 수 있다는 경고가 지금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여러 지표상 우리 사회는 이미 ‘부채 경제’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른 양극화와 사회적 불균형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기본소득 논쟁이 충분히 나올 법한 상황이다. 정부와 금융 당국은 부채 문제에 대해 “지금 단계에서 충분히 관리가 가능한 수준”이라고 진단한다. 향후 발생 가능한 여러 가지 시나리오에 따른 전망이다. 하지만 테일 리스크는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부채 규모가 점점 더 커지는 상황에서 맞닥뜨리는 테일 리스크는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위기에 이은 또 다른 경제위기를 촉발하는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가계도 기업도 정부도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지나치는 일들이 없는지 면밀하게 살필 때다.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