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문재인 보유국’의 역사 교과서

입력 2020-10-05 04:06

고등학생 책상에 놓인 한국사 교과서만 보면 남북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훈훈하다. 한반도 전쟁위기는 사라졌으며 통일도 꿈이 아닌 듯하다. 문재인정부의 검정 도장을 받은 교과서들이 이 모든 게 문재인 대통령의 치적이라며 치켜세우고 있다.

씨마스출판사는 “미국의 트럼프 정부가 주도하던 대북 제재와 압박은 더욱 강화되었다. 미국과 북한 사이 군사적 긴장이 높아져 갔다. 고조되던 한반도의 긴장은 2018년 문재인정부의 노력으로 큰 전환점을 맞이하였다”라고 썼다”(320쪽). ‘남북 화해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노력’ 단원 내용인데 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악수하며 웃는 사진을 한 페이지 전체에 할애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백범 김구도 교과서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다.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도 비슷하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문재인정부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한 대화 의지를 표명하고 북한도 이에 호응했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도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비핵화 문제가 논의되는 등 한반도 평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303쪽).

동아출판은 “남북한 정상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에 합의하고 남북 관계 개선, 군사적 긴장 완화, 평화 체제 구축을 약속하였다”라면서 문 대통령과 김 국무위원장이 잡은 손을 높이 드는 사진을 게재했다(290쪽). 문 대통령이 당선 이후 남북 관계는 물론 북·미 관계 개선까지 이끌고 있다는 서술 태도는 대동소이하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북한군이 우리 해양수산부 공무원을 총으로 쏴 죽이고 시신을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직 그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월북을 하려 했든 아니든, 북한이 보낸 통지문에 담긴 사과가 진정성이 있든 없든 부차적인 문제다. 항거불능 상태인 비무장 민간인을 바다에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살해하고 버렸다. 금강산관광에 나선 주부에게 총격을 가한 2008년 ‘박왕자씨 피살 사건’ 때나 지금이나 북한 사람들에게 남측 사람은 그렇게 해도 되는 존재였다.

지난 6월에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2018년 4월 문 대통령과 김 국무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한 뒤 서명한 판문점 선언의 결실이었다. 교과서들이 문재인정부 업적으로 집중 소개하는 내용이다. 북한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다음 날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동영상을 공개했다. 혈세 170억원이 허공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온 국민이 굴욕적으로 목도했다.

교과서가 쓰이는 시점에 남북 관계가 좋았다는 변명은 옹색하다. 과거 교과서들은 현직 대통령 관련 기술을 자제해 왔다. 정치적 논쟁에 휘말릴 수 있고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 이르기 때문이다. 칭찬하면 아부라는 비판을, 깎아내리면 검정 통과를 걱정해야 하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박근혜정부 국정 교과서도 “2012년 12월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됐다. 박근혜정부는 ‘국민의 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표방하며 국정을 시작했다”란 두 문장으로 줄였다.

집필진이나 출판사 책임으로 돌리는 것도 무책임하다. 검정 권한은 정부가 쥐고 있다. 교과서대로 배우기보다 교사와 상호작용으로 역사를 공부하므로 괜찮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문재인정부 사람들은 ‘교과서가 미래세대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끼친다’며 국정 교과서를 악으로 규정했었다. 교사들이 현장에서 바로잡을 수 있다면 국정화를 막을 이유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고교생쯤 되면 뉴스도 보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눈뜨기 시작한다. 교과서만으로 남북 관계를 인식하지 않는다. 교과서와 현실이 동떨어져 있으므로 나름 평가를 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최고권력자를 잔뜩 칭찬해놓은 책을 ‘역사’라며 공부하라고 쥐여준 기성세대에 대한 평가가 그다지 후하지 않을 것이란 점은 명확해 보인다.

이도경 사회부 차장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