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 위로 친서와 대남통지문 읽기

입력 2020-10-05 04:04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지난 3일 ‘하루빨리 완쾌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는 위로 전문을 보냈다. 지난 25일에는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에 ‘실망감을 더해 준 데 대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통지문을 보내왔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미국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전문을 보낸 것은 이례적이고, 한국에 신속한 유감 표명을 한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다음과 같은 의도에 따른 고도의 정치 행위이다.

김정은은 하노이 회담 결렬,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한국인 공무원 피살 등 격동하는 한반도 상황에서 트럼프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해 상황을 돌파하려 한다. 밥 우드워드의 책에서도 볼 수 있듯 김정은은 트럼프와의 ‘통 큰 결정’을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아 ‘대북 제재 봉쇄 책동을 분쇄’할 수 있는 방책으로 삼고 있다. 작년 12월 ‘정면돌파 노선’을 통해 이런 접근을 밝힌 바 있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재선을 원한다. 바이든이 되면 ‘정상적인’ 비핵화 회담을 추진할 것이다. 깜짝 만남을 통한 담판이 아니라 실무선에서 꼼꼼히 비핵화의 목표·방향·대상·상응조치 등을 망라한 로드맵이 마련돼야 정상회담을 하려 할 것이다. 이것이 바이든 캠프의 입장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실무협상 때마다 민감한 사안은 ‘최고 존엄’의 결정 사항이라면서 실질적 논의를 거부한 바 있다.

김정은 친서는 한국을 배제하고 북·미 관계에 몰입하는 북한 태도를 확인케 한다. 북한은 한국 공무원을 사살하고도 통지문을 통한 사과 외에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지만, 코로나에 걸린 트럼프에게 신속한 위로 전문을 보낸 것만 보더라도 남북 관계를 북·미 관계의 하위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지문의 사과도 퀸타나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이 지적한 것처럼 북한이 지시나 규정을 어기지 않았다고 선언한 상황이므로 사과라고 볼 수 없다. 북한 영해에서 자신들이 초래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해 유감이라는 수준이다. 특히 김정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추가 조치 없이 빨리 문제를 매듭짓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북한 체제는 헌법 위에 노동당 규약, 그 위에 최고지도자의 결정이 있다. 최고지도자의 무오성이 통치 원칙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한 번의 사과는 모든 것을 종결한다. 사과 바로 다음 날 “남측에 벌어진 사건의 전말을 조사 통보하였다”고 밝힌 것도 한국의 어떤 추가 요구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김정은 친서와 통지문 사과는 오토 웜비어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미국민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다. 트럼프의 대선 승리를 원하는 북한이 반인륜적 범죄행위 집단의 지도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비판을 우려한 계산된 행위로 볼 수 있다. 사과한 뒤 위로 전문까지 보내 북한이 완전히 비정상적이지는 않다는 이미지를 미국민에게 심어야 대선 이후 미국 상대로 협상을 걸어 원하는 것을 받아낼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대처해야 한다. 한 인간의 생명권을 무시한 북한의 만행에 해명이나 공동 조사를 단순하게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이 비극적 사태를 덮고 넘어가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우선 기한을 명시하고 북한이 응하지 않을 경우 국제사회 공조를 포함한 다양한 조치를 통해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는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입장을 북한에 밝혀야 한다. 관련자 처벌과 배상을 천명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9·19 남북 군사합의의 온전한 복원과 남북 군사공동위도 요구해야 한다. 원칙 차원의 대응이 미국만을 바라보는 북한의 시선을 돌리고 한국을 의미 있는 상대로 삼도록 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