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얼굴은 말합니다

입력 2020-10-05 04:02 수정 2020-10-05 04:02

지난봄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들었다. 박새가 부엌 창문 너머에 둥지를 튼 것이다. 알을 낳을 모양이었다. 뜻밖의 방문객이 궁금해서 좀 넘겨다보았더니 반응이 여간 까칠하지 않다. 이쪽으로 험상궂은 눈길을 보낸다. 시인이 노래한 그대로였다. “갑자기 박새 부부 내 앞을 달겨든다. 네 집이기도 하지만 내 집이기도 하다”(복효근, ‘박새에게 세 들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그때부터 보름 이상 창문도 자유롭게 열지 못하고 박새 눈치를 봐야 했다.

이번 추석에 박새를 다시 생각한 것은 청산도 이강안 선생 때문이다. 청산도는 전라남도 완도에서 뱃길로 1시간 떨어진 곳에 있다. 2000명 넘는 주민이 살고 있으니 작은 섬이라 할 수는 없다. 이곳 하나밖에 없는 병원을 연세 지긋한 이강안 원장이 17년째 지키고 있다. 이 원장은 서울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안정된 삶을 누리다가 2004년 청산도로 왔다. 1년 전에 생긴 병원이 의사가 없어 폐업 위기에 몰린 것을 보다못해 스스로 내려온 것이다.

그는 오전 7시40분부터 진료를 시작한다. 환자들이 거의 모두 어민과 농민이라 그들에게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됐다. 밤낮없이 환자들을 만난다. 중증 환자들을 위해 이웃 섬으로 왕진도 자주 나선다. 그뿐만 아니다. 그는 매년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기증한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에게 쌀과 고기를 선물하고 외로운 노인들을 위해 경로잔치를 연다. 이 원장은 이렇게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우리 나이로 86세 고령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건강하다는 사실이다.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구부려 환자를 진료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최강 동안’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얼굴이 너무나 맑고 깨끗해서 세월을 속이는 듯하다. 지난주 추석특집 방송에서는 82세 할머니 환자가 이 원장을 ‘혼내는’ 장면도 나왔다. “아프면 안 돼요. 오래오래 살아서 우리 같은 사람 치료해줘야지.” 이런 축복까지 받으니 그의 노후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을 돕고 사는 것이 그가 (그리고 그의 부인까지) 남다른 건강을 누리는 비결이다.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도 그렇게 생각했다. 베풀고 살면 나이가 들어도 청춘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도 두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확언했다. ‘아직 살 만한 세상’을 장식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 이웃을 보듬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강안 원장처럼 환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지난주 다른 얼굴도 보았다.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진행된 1차 TV 토론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추한 모습을 다 보여주었다. 토론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탈법과 탈선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 인종차별 같은 반인륜적 범죄마저 은근슬쩍 두둔한다.

트럼프는 철저하게 ‘적과 아군’으로 편을 가른다. 자기에게 도움이 안 되면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짓밟는다. 그는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면 나라가 쪼개지고 갈라지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실제 트럼프 집권 이후 미국이 심각하게 분열하고 있다. 정치적 이유로 친구끼리 다투고 가족이 등을 돌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제2의 남북전쟁 괴담까지 떠돈다. 미국 사회에 당파적 대립이 극심한 틈을 이용해 11월 3일 대통령 선거일에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할 것이라는 보도까지 나온다. ‘합중국’이 깨지고 있다.

트럼프는 이런 상황 앞에서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화합이나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단어가 그의 인생 사전에 없는 모양이다. 그런 트럼프의 얼굴을 TV 화면을 통해 자세히 본 순간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사람의 얼굴과 너무 달랐다. 탐욕과 아집이 얼굴에 가득했다.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다. 저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둔 미국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4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맑고 깨끗한 얼굴을 자랑했다. 그 얼굴로 온 국민을 함께 보듬고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그 얼굴은 아니다. 세월을 탓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편 가르기와 갈라치기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도 편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은 대통령의 밝고 환한 얼굴을 볼 권리가 있다.

서병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