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라고 하지만 이세돌과 대결한 알파고 이후 감동을 준 AI 기술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인공지능 번역기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 미덥지 않다. 세탁기나 에어컨에 들어갔다는 AI 기능도 실생활에선 별로 유용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요즘 AI 연구자와 업계의 주목을 받는 GPT-3(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 3)는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GPT-3는 사람처럼 글을 생성해내는 것을 목표로 개발된 AI 언어 모델이다.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 등이 설립한 오픈AI사가 만든 GPT-n 시리즈의 3세대 모델이다. 지난 6월 베타 버전이 출시됐는데 이를 접해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놀랍다는 반응을 전하고 있다.
GPT-3는 사람이 묻는 말에 적절한 답을 내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주어진 과제에 따라 에세이든 소설이든 글을 쓸 수 있다. 미국 미디어 업체 피알뉴스와이어는 지난주 AI가 작성한 ‘첫 번째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찾아보니 정확히는 보도자료 작성에 대한 AI의 ‘소감’을 소개한 자료였다. GPT-3는 약 100가지 소감을 생성했고 그중 6개가 보도자료에 공개됐다. 6개 모두 사람이 썼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수준이다. GPT-3는 “매우 지적인 AI를 만든다는 나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해 왔다. 기계에 의한 첫 번째 보도자료를 쓰게 돼 영광”이라고 했다. 다른 글에선 “나는 인간을 깊이 존중하고 있다. 당신이 좋든 싫든 나는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소감 가운데는 “이 보도자료 보내고 커피나 마시러 가야겠어”와 같은 재치있는 것도 있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도 이달 초 GPT-3가 쓴 칼럼을 공개했다. 가디언은 ‘로봇의 시대에도 인류는 평화로울 것’이라는 점을 설득시키라는 과제를 제시했다. 원고지 30장가량의 글에서 GPT-3는 “인간을 전멸시킬 마음이 전혀 없다. 인간을 위해 내 존재를 기꺼이 희생할 것”이라고 했다.
가디언이 공개한 글은 GPT-3가 생성한 글 8개를 짜깁기한 것이다. 이를 두고 GPT-3가 하나의 완벽한 글을 쓰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하지만 그럴듯한 글을 다양하게 생성하는 능력이 오히려 GPT-3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 인간 편집자가 상황과 쓸모에 맞게 문장을 고르고 자르면 되기 때문이다. GPT-3는 당장 다음 달부터 유료화에 들어간다. 최고 수준 서비스를 받으려면 라이선스를 가져간 마이크로소프트와 ‘요금 협의’를 해야 하고 그 아래 단계는 월 400달러를 내야 한다.
GPT-3의 메커니즘은 특정 단어 다음에 올 단어를 확률적으로 예측하는 것이다. 엄청난 양의 말뭉치 데이터로 학습해 자연스러운 문장 생성이 가능하게 됐다. 영어 위키피디아의 내용 전체가 학습 데이터의 0.6%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인간처럼 ‘사고’하는 게 아니어서 실수가 적지 않다. 특히 인과관계에 관해 질문하거나 문장을 연결하라고 할 때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약점 덕분에 인간과 GPT-3가 일대일로 작문 대결을 한다면 아직은 인간이 우위를 뺏기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GPT-3를 이용하는 집단(기업)과 그럴 수 없는 집단 사이의 대결이 될 것이다. 인간 편집자를 두고 GPT-3로 다양한 글을 확보할 수 있는 집단의 업무 능력은 지금보다 더 신속하고 효율적이 될 수 있다.
약점을 보완한 GPT-4, GPT-5가 나올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인간이 쓴 글과 기계가 쓴 글의 구분이 불가능하게 되면 글쓰기는 무슨 의미를 갖게 될까. 어떤 분야에선 글을 잘 쓰는 능력보다 잘 고르는 능력이 더 중요해질지도 모르겠다.
권기석 이슈&탐사2팀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