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 위신이 형편없이 떨어졌다. 이 추락을 환영하는 사람이 많다. 겉으로 대놓고 반기는 사람도, 속으로 은근히 즐기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국회에 불신을 피력하며 국회 권한을 줄여야 한다고 외친다. 주로 시민단체나 언론계에 많다. 후자는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국회 위상을 떨어뜨리고 국회 영향력을 깎는 행동을 하며 국회 위축으로부터 반사이익을 얻는다. 주로 행정부 쪽에 포진하고 있으나 일부는 정치권, 심지어 국회에도 존재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조화롭게 성숙하려면 대의기관이자 입법기관인 국회의 추락을 반기는 모두를 경계해야 하나, 특히 악영향이 큰 후자를 조심해야 한다.
우선 국회를 대놓고 비판하며 그 권한의 축소를 주문하는 쪽을 보자. 국회가 정쟁에만 몰두해 국정을 파탄 내고 온갖 비리를 쏟아내고 있으니 의원의 수와 특권을 줄이고 권한에 제약을 가하자고 한다. 이 주장은 논리가 단순 명료해 국민 호응을 얻기 좋다. 여론조사상 국민은 이러한 주장에 압도적 지지를 보낸다. 축소론을 넘어 국회 무용론마저 등장할 정도다. 각종 오프라인 집회와 온라인 대화방에 의원 행태가 얼마나 한심하고 비리가 심한지, 의원 특권이 얼마나 큰지, 국회 규모와 기능 축소가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분노와 조롱의 말이 넘쳐난다.
오죽하면 국회 축소에 대한 노골적 소망이 확산되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소망은 실제로 관철되기 힘들다. 민주주의를 위해 강한 국회가 필요하다는 당위론이 명분을 지니기 때문이다. 보기 싫으니 줄여버리자는 감정론이 당위적 명분론을 넘기엔 역부족이다. 국민도 여론조사에서 극단적 혐오감을 숨기지 않을지 몰라도 실제로 국회를 위축시키면 곧 독재정치가 올 수 있다는 이성적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 경계해야 할 대상은 국회의 추락을 겉으로 외치지 않으나 속으로 즐기며 상대적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수동적으로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일상적 행동으로 국회 위상을 떨어뜨리고 기능을 저해하는 결과를 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청와대를 중심으로 행정부의 최고위급 간부 상당수는 국회의 이견이나 비판을 무시하고 심지어 국회를 모욕함으로써 국회 위상과 역할에 타격을 가한다. 여야 지도부, 지방자치단체장 중에도 활동이나 발언을 통해 국회 존재가치를 훼손시키는 예는 드물지 않다. 그들은 굳이 국회 축소를 외치지 않아도 개인적 인지도를 이용해 국회 의사 과정을 뒤흔들거나 무력화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의원이 국회 위축의 반사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편을 들거나 결과적으로 국회 위신을 떨어뜨리는 데 앞장선다. 의원 상당수는 자기 주체성을 세우지 못하고 거대한 진영논리에 빠져 집단주의적 대결의 도구로 전락해 있다. 청와대발(發) 의제는 무조건 엄호하거나 무조건 반대한다. 행정부 측의 명백한 정책 실패나 비리도 궤변과 어불성설 비유로 감싸기에 급급하거나 대안 없는 공격에 몰두한다. 우리는 다 옳고 남은 다 그르다는 ‘내로남불’ 이분법적 논리는 유치하고 비열한 데 그치지 않고 국회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키고 국회 위상과 역할에 찬물을 끼얹는다. 기관으로서의 국회가 추락해도 의원으로서 입지를 다질 수 있다면 만족해하는 것 같다.
최근 개인 비리 혐의나 망언으로 국회를 추락시킨 의원도 많다. 축재 과정이 의심스럽거나 이해충돌 여지가 큰 예, 투기 의심을 받거나 재산신고를 과하게 축소한 예, 창업한 기업의 실직 사태도 남의 일처럼 말한 예, 공익단체를 불투명하게 운영하고 피해자들을 이용해 감투를 쓴 예, 선거관리위원의 중립성을 하찮게 말한 예, 자기편 비리를 폭로했다고 공익제보자를 매도한 예 등. 논란의 의원이 많이 나올수록 국회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국회가 위축될 때 그 힘의 공백은 행정부가 메워 행정부 독주체제가 구축된다. 이미 4차 산업혁명, 경기침체 등으로 행정부 영역이 비대해졌는데 코로나19가 힘의 추를 더욱 그쪽으로 밀고 있다. 민주주의의 큰 시련이다. 그러므로 의원들의 진영논리와 일탈을 비판하되 국회 자체와 동일시하지 않는 국민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의원 스스로도 소명의식을 갖고 국회에 해를 끼치지 않게 자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국회의 추락을 속으로 반기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선 곤란하지 않겠는가.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