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스톡푸어’ 세대

입력 2020-09-28 04:06

아마 10년 전, 그러니까 막 제대했을 때쯤으로 기억한다. 일본에서 건너온 ‘워킹푸어’라는 신조어가 신문과 방송을 온통 뒤덮었다. 문자 그대로 일하는 빈곤층, 즉 아무리 일해도 자산을 모을 수 없는 세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 단어는 우리 사회를 한동안 배회하며 ‘하우스푸어’ ‘에듀푸어’ 등 여러 파생어를 남겼다. 우리 현실이 일본과 다를 바 없어 사람들이 공감한 결과였는지, 혹은 복잡다단한 우리 사회 빈곤 문제를 언론이 그저 자극적으로 강조한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다. 파생어 중에는 빚을 내 주식을 사들이다 빈손이 된 이들을 뜻하는 ‘스톡(stock)푸어’라는 단어도 있었다.

“겨우 이 돈만 가지고 계속 살 수는 없잖아요.” 평생 주식이라고는 해본 적 없던 후배 A가 말했다. 최근 자취생이 된 A는 5평 남짓한 전세방을 얻고 어렵게 남겨놓은 정기예금 1080만원을 깨서 카카오게임즈 공모에 증거금으로 쏟아부었다. 큰맘 먹고 일생일대의 투자를 벌인 결과는 달랑 1주. 어차피 정기예금 연이율이 2%도 안 되는 터라 그다지 손해 볼 것도 없었지만, A가 위험을 좀체 감수 않는 성격인 걸 아는 나로서는 그가 예금을 깨서 주식을 했다는 자체가 의외였다. A는 이후 다른 종목에도 손을 대고 있다.

후배 B의 지인은 취업준비생이다. 공대를 졸업했지만 코로나19 여파 때문인지 요새는 취업이 더 안 되는 모양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 지인은 요새 알바비를 털어 주식에 몰아넣고 있다. 그 역시 이전까지는 구두쇠에 가까운 성격이라 대부분의 알바비를 쓰지 않고 모아놨더랬다. 그렇게 아껴놓은 돈을 주식시장에 몽땅 털어넣도록 안내한 건 주식 유튜버였다. 그는 요즘 단체채팅방에서 자신이 산 종목과 주워들은 온갖 주식 전망에 대해 쉬지 않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한다.

좀 기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코로나19로 닥친 생활고 때문에 목숨을 끊는 이들이 넘쳐난다는데, 주위에서는 온통 주식 이야기뿐이다. 지금이라도 장에 들어와야 한다는 소리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오픈채팅방 등에 넘쳐난다. 수천 수만개 점포들이 문을 닫는다는 뉴스가 나오지만, 정작 실물경기 기대치를 반영하는 지표인 코스피지수는 코로나 사태 이전보다 높게 치솟았다. 예전 금융 취재를 담당할 때 보고 들은 상식으로는 이해가 힘든 일들이었다. 언론은 이 같은 모습을 ‘동학개미운동’이라며 치켜세웠다.

개인이 주식시장에 앞다퉈 뛰어드는 건 대개 호황기에 있는 일이다. 반등을 기대하는 심리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실제로 기업이 손에 잡히는 이익을 낼 것이란 기대에 근거를 둔다. 언제 코로나19 백신이 나오고 또 상용화될지, 그리 된다 해도 세계 경제가 회복할지 아무도 확신 못할 상황에서 현 주식시장 상승치만 한 기대를 수많은 ‘개미’들이 실물경제에 하고 있다는 가정은 설득력이 없다. 결국 반등할 주식시장 자체에 대한 기대와 거기서 손쉽게 이익을 보려는 욕망이 뭉뚱그려진 결과라는 이야기다. 실물경기와 상관없이, 단순히 주식 가격이 오를 것이란 기대 때문에 차익을 남기려 돈을 붓는 건 ‘투기(speculation)’의 사전적 정의와 정확히 일치한다.

‘모두가 언젠가 계산서를 치를 것’이라는 관용구적 예언을 하려는 게 아니다. 10년 전 ‘스톡푸어’라는 단어가 나왔을 당시와 비교해 최근의 주식 열풍은 사회초년생, 심지어 대학생이나 취업준비생에게까지 훨씬 더 깊숙하게 뻗쳐 있다. 노동으로 자본을 축적할 수 있다는 기대가 사라진 ‘푸어’의 세상에서 이들은 제대로 노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없는 돈을 짜내고 빚을 내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 경제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한 이 시국에, 아직 자본을 얼마 쌓지도 못한 이들이 가장 불확실한 자산인 주식에 무리해서 돈을 붓는다는 건 이들이 바라보는 미래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코스피지수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르내릴지와는 별개로, 이 새로운 ‘스톡푸어’ 세대가 의미하는 바를 우리는 더 고민해야 한다.

조효석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