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도 인생도 늦어도 괜찮아요. 안전하게 와주세요.’ 책에 저자 사인을 부탁하자 박정훈(35)씨는 “사인 같은 거 없는데…”라고 열없이 웃으며 이렇게 적어주었다.
박씨는 4년 차 라이더다. 부산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알바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배달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라이더유니온’을 이끌고 있다. 주중에 노조 일을 하고 주말에 맥도날드, 배민 커넥트, 쿠팡이츠 라이더로 오토바이를 탄다. 최근 출간된 ‘배달의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를 포함해 여러 권의 책을 냈으며, 노동과 인권 강의도 한다. 노조 상근비가 없기 때문에 거의 주 7일 일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라이더유니온은 지난해 5월 1일 노동절에 출범했다. 이들이 내건 모토는 ‘모든 라이더는 안전하게 달릴 권리가 있다’. 현재 노조원은 300명 정도로, 오토바이 라이더뿐만 아니라 자전거, 자동차로 배달하는 조합원도 있다.
택배와 배달은 코로나 시대 ‘비대면’의 일상을 떠받치는 버팀목이 됐고, 배달 노동자들은 K방역의 숨은 인력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배달원에 대한 관심도 이어졌다. 이달 초 ‘라이더 연봉 1억 시대’라는 기사가 온라인을 달궜고, 인천 을왕리에서 배달 가던 치킨집 주인이 음주차량에 숨졌다는 소식은 안타까움과 공분을 자아냈다. ‘도로 위의 무법자’라는 꼬리표가 붙던 라이더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달라지고 있는 걸까.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를 무사히 넘긴 데는 배달의 힘이 컸다.
“라이더들이 이렇게 주목받는 시기가 없었던 것 같다. 분명히 ‘진상’ 손님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고, 분위기가 과거보다는 점점 좋아지는 방향으로 바뀌는 걸 느끼고 있다.”
-손님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은 라이더가 가져온 음식은 수령을 거부하면서 정작 마스크를 쓰고 물건을 받는 손님은 한 번도 못 만났다고 쓴 글을 읽었다.
“라이더들 애환이라는 게 뻔하다. 소비자들한테 바라는 건 주소를 제대로 써주셨으면 하는 거다. 휴대폰이 위치를 자동으로 잡아주는 기능이 정확하지 않아 저희가 딴 건물로 가는 경우가 많다. 또 하나는 무심함이다. 아파트 입구에서 13층 호출하고 엘리베이터 탔는데, 라이더가 13층에 도착하면 그제야 ‘잠시만요’ 하고 카드 찾는 분이 많다. 그러면 배달이 지연되고 라이더들 신호 위반으로 이어진다.”
-배달 가다 숨진 을왕리 치킨집 사장님과 치킨을 받지 못한 손님에게 사과문을 쓴 딸의 사연이 라이더들에게는 남달랐을 것 같다.
“라이더들 카톡방에서 따님의 댓글 캡처가 돌아다녔다. 죄송하다는 그 글에 많이들 마음 아파했다. 저희 조합원 중에도 장사하면서 배달을 같이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동병상련 아니겠나.”
-조합원 중에도 사고가 있었나.
“사고는 익숙하다. 늘 있는 거다. 2.5단계 거리두기 전에 조합원 모임을 했는데 오른팔 깁스, 왼팔 깁스, 발 깁스, 환자들이 모여 있더라. 조합원 사망사고는 유족들에게 도와 달라고 연락이 오는데, 그래서 라이더 노조는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사건사고가 많아서 정신적으로 힘들다.”
-이번 여름 폭우 때 부산에서 허벅지까지 빗물에 잠긴 채로 배달에 나선 라이더 사진이 화제가 됐다. 조합에서 폭우와 폭설, 폭염과 한파 때 작업 중지권을 주장한다고 알고 있다.
“몇 시간 동안 배달을 중지할 수 있게 플랫폼이 주문 접수를 막는 걸 제안했다. ‘택배 없는 날’처럼 ‘배달 없는 날’은 불가능하다. 그날 자영업자들의 배달 매출이 없어지는 거니까. 자영업자 휴일이 이뤄져야 배달 휴일도 이뤄진다. 자영업자들의 노동권을 위해 이번 추석 하루는 다 같이 쉰다, 그래야 가능할 것 같다.”
-라이더 연봉 1억 얘기를 안 꺼낼 수 없다. 지난달 30일 한 라이더가 하루 47만1100원을 벌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연봉 1억이 되려면 기본 배달비 외에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악천후, 주문이 몰리는 주말, 건수가 많은 강남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1년 내내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일 아닌가.
“그렇다. 그날이 태풍이 오는 주말이었기 때문에 물량은 많고 라이더는 적어서 쿠팡이츠가 추가로 보너스를 지급했다. 그 라이더가 하루 57건을 배달했던데, 한 시간에 4~5건 했다고 쳐도 12시간 쉬지 않고 미친 듯 일한 거다. 그날 라이더가 3만3000명쯤 접속했을 텐데 그중에 1등, 확률이 3만3000분의 1인 거다.”
-실제 수입은 어느 정도 되나. 작년 배달의민족은 라이더들 월 평균 소득이 380만원 안팎, 상위 10%는 월 630만원 이상이라고 발표했는데.
“그 정도 될 수 있다. 하지만 라이더들은 자기 오토바이가 없으면 빌려서 일하기 때문에 렌트비, 기름값, 수리비, 보험료 등을 감당해야 한다. 월 500만원을 벌어야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버는 게 된다.”
-라이더유니온은 기본 배달료가 4000원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나. 교통 신호를 지키면서 안전하게 배달할 수 있고, 최저임금보다 나은 수입을 올리기 위한 ‘안전배달료’라고 했다.
“배민의 최소 배달료가 3000원, 쿠팡이츠가 3300원이다. 하루 47만원 벌었던 라이더의 당일 건당 배달비가 8200원이었는데, 바로 다음 날 배달료가 3500원으로 떨어졌다. 플랫폼 입장에서는 언제든 배달료를 내릴 수 있기 때문에 하한선을 건드리는 게 싫을 거다. 대신 저희가 한번에 묶음 배송을 3개 이상 하지 않는다든지 안전 규제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정말 위험하게 운전하는 라이더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희도 분명히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조합에도 안전상담사가 있고, 교통경찰과 함께 안전교육을 한다. 오토바이를 개조해 소음을 내는 몇몇 라이더가 있는데, 저희도 그 사람들 싫어한다.”
-집에서 라이더로부터 따뜻한 음식을 배달받을 땐 고마우면서도, 운전하거나 걸을 때 배달 오토바이를 만나면 흠칫하게 된다.
“배달하면서 감자튀김이나 치킨 빼먹는다는 소문도 있지 않았나. 하지만 그게 대부분의 여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생한다고 말해주는 분이 훨씬 많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는다. 악플 때문에 운전 습관을 바꿀 라이더는 없다. 자정 노력은 하고 있지만, 배달산업의 구조를 그냥 놔둔 상태에서는 효과가 없는 거다.”
박 위원장의 이야기는 손님들과의 미담보다 라이더를 향한 악플에 대해 더 길게 이어졌다.
“악플 다는 분들의 의견은 ‘인국공 사태’부터 드러난 공정 논리의 연장이라고 본다. 공부를 열심히 안 했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게 된 거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된다는 거다. 이게 우리 시대의 공정성이고, 평등보다 위에 있는 담론이 됐다. 안타까운 건 악플 다는 분들도 사실 그 공정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우리끼리 싸우는 셈이다. 이번 의사 집단휴진을 보면 누가 뭐라 하든 상관없이 뭉쳐서 가지 않나. 그걸 보면서 단체행동, 노동조합 이런 영역까지 특정 계층의 권한과 권리처럼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했다.”
-플랫폼 얘기를 해보자. 우리가 ‘혁신’이라 부르는 많은 플랫폼산업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분야가 배달앱 시장 아닌가.
“작년 ‘타다’ 논란 때도 버겁기는 했지만 ‘혁신적인 불법’이라고 목소리를 냈었다. 타다는 불법파견 논쟁이 있었고, 불법적인 지휘·감독까지 있었다. 플랫폼들은 근로기준법을 회피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권한과 권리를 다 가져가려 한다. 배달대행 플랫폼 역시 회사 로고가 박힌 유니폼을 라이더들에게 입히고, 사고가 나면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걸 혁신이라 할 수 있을까.”
박 위원장은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쉬는 이상적인 플랫폼은 상상에서만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라이더들은 계약서상 사장님이지만 사실상 근로자보다 더 강하게 플랫폼 업체의 지휘·감독을 받는다며 ‘헬조선식 플랫폼’이라고 했다. “동네 배달 대행사에선 왜 출근 안 하느냐고 전화나 카톡을 하거나 빨리 가라고 강제 지시를 한다. 일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해도, 욕설을 해도, 불법적으로 지휘·감독을 하더라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괜찮으니까.”
-플랫폼 노동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는 어떤 것인가.
“최근 대형 업체들이 봉건적 지휘·감독을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라이더들이 일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만들어지는데 알고리즘이 최적의 배달이라고 라이더들에게 주는 것, 배달비를 조정하는 것을 지휘·감독으로 볼 것이냐, 그리고 알고리즘을 상대로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다. 이건 전 세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이슈다. 이제야말로 플랫폼 노동에 대해 논쟁을 해야 될 때가 왔다.”
박 위원장은 한 시사 잡지가 선정한 NGO부문 차세대 리더로 꼽히기도 했다. 결국 국회로 가는 게 목표 아닐까 싶었는데, 뜻밖에 마흔이 되기 전에 귀촌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저는 인재들을 계속 여의도에 뺏기는 게 아쉬웠어요. 저렇게 젊고 능력 있는 분들이 운동 현장에서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저는 영원히 여의도가 아닌 현장 활동가로 남고 싶어요. 지금은 온통 서울 담론만 있으니까 저 같은 ‘관종’이 시골에서 몇 년을 더불어 녹아들고 나서 관종짓을 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