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4번’도 감사

입력 2020-09-24 00:08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제목은 ‘영웅’입니다. 교향곡 제3번보다 더 유명한 곡은 교향곡 제5번 ‘운명’입니다. 운명은 많은 방송 프로그램 등에 삽입될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향곡 3번과 5번 사이엔 몇 번이 있을까요. 당연히 4번이 있습니다. 그런데 클래식 채널에서조차 교향곡 4번은 의외로 자주 나오지 않습니다. 유튜브에서 ‘베토벤 교향곡 4번’을 검색하면 3번과 5번보다 훨씬 적은 수의 영상이 노출됩니다.

그렇다고 4번이 잘 써진 곡이 아닐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독일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은 “베토벤의 천재성은 4번에서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유명하지 않은 4번으로 베토벤은 ‘천재 음악가’가 된 것입니다.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9,11)

살다 보면 자의든 타의든 오늘 본문 같은 상황을 한두 번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말석에서 일어나 상석으로 가는 것이 반대 상황보단 훨씬 낫습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상석이 비어 있지 않고 누가 있었다면 그날의 낯 뜨거운 경험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잔치에 참여한다면 꼭 상석에 앉아야 합니까. 최소한 중간에라도 앉아야 합니까. 그래야만 그 잔치에 참여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석에 앉더라도 그 잔치에 참여한 것입니다. 설령 상에 못 앉고 바닥에 깔린 멍석에 앉았다 하더라도 잔치에 참여한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상석에 있는 사람과 말석에 있는 사람의 위치에서 보고 행동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상석과 말석이 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일에서 쓰임 받고,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박수받고 세워지는 모습, 심지어 받는 은혜의 양도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어디에 앉는 게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부분이 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쓴소리로 가득한 요즘, 우리는 다시 결단해야 합니다. 주인의 청함을 받고 그 잔치에 참여했다면 ‘내가 누군데’를 주장하지 말고 초대받은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교회와 크리스천은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과 5번 ‘운명’ 같은 존재가 아니어도 괜찮아야 합니다. 아니 그사이에 끼어서 유명하지 않은 ‘4번’이길 자처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결심이 선다면 굳이 상석을 고집할 이유가 없게 될 것입니다.

연극에서 무대에 오른 배우는 연극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전체를 제일 잘 보는 사람은 무대 밖에 있는 각 분야 감독들입니다. 오디오 조명 무대 현장 등 각 분야의 감독들은 지금 얼마나 연극이 잘되고 있는지 바로 압니다. 무대 한가운데 있지 않고 전체를 볼 수 있는 무대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기쁘고 충분히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있는 주인공이 아니어도 하나님의 역사 안에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각오로 살아야 할 때입니다. 이 각오를 통해 낮고 험한 곳을 애써 찾으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기 소망합니다.

김주선 교육목사(수원영은교회)

◇페이스북 그룹 ’하나님의 창고’는 나에게 쓰임은 다했지만, 여전히 가치 있는 물건들을 대가 없이 나누는 곳입니다. 볼펜 한 자루, 설탕 한 봉지부터 냉장고,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나누고 함께 격려하며 이 땅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루고자 합니다. 김주선 목사는 ‘하나님의 창고’ 지기로 섬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