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영혼을 파괴하는 디지털 성범죄

입력 2020-09-22 04:01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한다. 성관계 동영상 유포 협박을 받는다며 찾아왔던 한 여성 의뢰인은 자신이 나오는 동영상이 끔찍하지만 계속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며 상담 중 흐느꼈다. 인터넷상에 퍼졌을 때 수치스럽더라도 영상 속 등장인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제3자에게 확인시키고, 영상을 삭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성착취물 유포를 가장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교묘히 이용한다. 동영상 유포를 빌미로 협박하고, 협박을 통해 다시 피해자의 성착취물을 만들고, 심지어 유통시켜 돈까지 벌면서 가해자는 피해자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통제하고 말살한다.

늦었지만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디지털 성범죄의 양형기준을 마련한 것은 다행이다. 지금까지 기준조차 없었다는 점은 아쉽지만, 뒤늦게나마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물 제작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에게 최고 29년3개월까지 선고가 가능하도록 하고, 구체적인 가중·감경 요소의 기준을 세운 것은 긍정적이다. 그동안 성범죄가 사법부의 판결을 먹고 자라왔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일부 법원 판결은 고무줄 형량에 솜방망이 처벌 논란을 자초했는데, 이는 통일된 양형기준이 마련되지 않았던 탓도 컸다.

이번에 마련된 양형기준이 과도한 것 아니냐는 반론도 나오지만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에 대한 ‘인격 살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피해가 심각하다. 성착취물이 유포되면 피해자로서는 누가 영상을 보았을지, 앞으로 누가 보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함 속에 제대로 된 일상을 살기가 어렵게 된다. 또 영상을 없애주겠다는 가해자의 말을 믿고 가해자 요구에 끌려다니다가 더 큰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의 신체에 직접적인 유형력을 행사하는 강간이나 강제추행 등에 비해 가볍게 여겨지기도 하는데 피해자 입장에서는 직접 신체에 위해가 가해지는 성범죄보다 그 피해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성착취물의 판매, 배포, 구입 등에 대한 처벌 기준을 마련한 것도 긍정적이다. 성착취물이 무분별하게 유통될 때 피해자에게 회복 불가능한 피해가 초래되는 만큼 이번 기준안은 영리목적 판매의 경우 27년형까지 선고가 가능하도록 했다. 외국과 달리 우리의 경우 성착취물을 구입한 사람에 대한 처벌이 너무 약하다는 지적도 계속돼 왔는데, 이번 안은 성착취물을 구입한 경우의 기본 양형을 징역 10개월~2년으로 정해 처벌이 가볍지 않도록 했다. 성착취물 제작뿐 아니라 판매, 배포, 구입까지 철저하게 처벌해야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할 수 있는 만큼 반드시 필요한 조치들이었다고 생각된다.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안을 두고 사법부의 반성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성착취물을 ‘야동’이라는 가벼운 용어로 호칭하며 디지털 성범죄에 관대했던 사회 분위기, 여기에 호응하듯 가해자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려 법원의 직무유기라는 비판에 직면했던 종전의 몇몇 판결들, 이번 양형기준안에는 사법부의 이런 과거에 대한 반성의 뜻도 담겨 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양형기준 마련의 기폭제가 됐던 n번방 사건의 조주빈 일당에게는 정작 이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양형기준안은 추후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12월에 최종 의결되기 때문에 이미 재판에 넘겨진 조주빈 등에게 소급 적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양형기준이 확정되기 전이라도 재판부의 결단으로 양형의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고, 같은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있기도 하다. 사법부는 조주빈 일당에게 강화된 양형기준을 적용함으로써 실질적인 반성의 첫걸음을 떼야 할 것이다.

장윤미 한국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