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여자가 뭐 어때서… ‘언니들’이 예능계 뜬다

입력 2020-09-21 04:05
예능가에 ‘언니들 예능’이 뜨고 있다. (왼쪽 위 부터 시계방향으로) 티캐스트 e채널 ‘노는 언니’의 박세리, MBC ‘놀면 뭐하니?’의 엄정화, KBS2 ‘박원숙의 같이삽시다’의 박원숙, KBS2 ‘옥탑방의 문제아들’의 박정수. 각 방송화면 캡처

박원숙, 박정수, 박세리, 엄정화…. 1980~90년대를 호령했던 언니들은 더 이상 추억 속 인물이 아니다. 요즘 예능에는 왕년에 잘나갔던 언니들이 대거 나온다. 이 언니들은 지금까지 여성에게 강요되던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지며 방송가에서 정형화됐던 나이든 여성의 이미지를 깨고 있다.

지금까지 예능 속 여성은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거나 얌전하게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 정도만 했다. 이마저도 출연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명맥을 이어온 대표 예능들은 주로 남성만 출연했다. 여성으로만 이뤄진 ‘무한걸스’ 같은 시도가 있었지만 남성으로 이뤄진 프로그램의 아류작 그 어디쯤이었다. ‘나이든’ 여성이 설 곳은 더 비좁았다. 여성의 자본은 외모이고, 능력은 젊음에서 나온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두 가지 모두 잃어버린 언니들은 “얘도 한때 굉장했어”하는 이들이 만든 기억에 살 뿐이었다.

한국의 연령주의는 단단해서 세월이 지나면 그 나이에 맞는 고정관념을 강요받았다. TV에서 여성은 엄마 혹은 노처녀로 이분화됐고, 자신의 자리를 젊은 세대에 내어줘야 했다. 지금은 다르다. 현재 문화의 주 향유층은 경제력 있는 30~40대 여성이다. 이들은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고, 최근 TV 속 언니들은 그 갈증을 제대로 저격했다. ‘센 언니’가 아니어도 좋다. 그저 지금을 살아가는 언니라면 괜찮다.

MBC ‘놀면 뭐하니?’의 새 프로젝트인 환불원정대에는 50대 여가수 엄정화가 등장한다. 첫 회동 날, 엄정화는 검은 스모키 화장 뒤로 수줍은 미소를 띠며 이런 말을 건넸다. “효리야 고마워”. 속내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앨범을 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어. 우리 시절에는 서른이 넘은 댄스 여가수는 드물었어.” 이효리가 답했다. “정화 언니가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몰라요. (서른이 넘어서) 앨범 낼 때마다 ‘맞아, 정화 언니도 했었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엄정화는 40대를 건너 50대를 맞이한 지금도 춤을 춘다. 이 길은 이효리를 포함한 여러 후배 여가수의 내일이 될 예정이다.

KBS2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도 파격이다. 혼자 사는 중장년 여성들의 동거 생활을 관찰하는 예능은 전무후무하다. 이곳에서 ‘여자라 당연한’ 일은 없다. 평균 연령 66세의 언니들은 사회가 빚어 놓은 성 역할을 거부한다. 주방에 서면 허당미를 뿜어내며 꺄르르 소녀처럼 웃고, 어쩌다 능숙히 해내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엄마 집밥이 그립다”는 게스트에게 “잘못 왔네”라고 답하며 엄마들은 모두 살림꾼이라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깬다. 최근 방송에는 배우 이효춘이 나왔다. 60대 여성인 그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전 연하에게 인기가 많아요. 연애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60대 여배우 박정수도 최근 KBS2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해 애인인 정을영 PD와의 동거 생활을 솔직히 털어놔 주목 받았다. “매일 전쟁 같은 사랑 중이에요. 양치하다 싸우기도 하고….” 그는 동기인 고두심이 멜로 연기를 꿈꾸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후 “이 나이에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음, 우리도 할 수 있어요”라며 웃었다.

티캐스트 e채널 예능 ‘노는 언니’도 혜성 같다. 골프선수 박세리를 포함해 은퇴한 여성 운동선수들이 출연한다. 강호동을 시작으로 서장훈, 안정환 등 남성 스포테이너(스포츠 선수+엔터테이너)는 끊임없이 탄생했으나 여성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박세리는 “여자 선수들은 왜 은퇴 후엔 안 보일까, 생각하던 찰나에 기회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곳엔 여성이라면 피할 수 없는 몸매나 외모에 관한 평가나 지적이 없다. 굳이 꼽으라면, ‘여자치고는’ 몸에 근육이 많아 악성 댓글에 시달렸다는 정유인에게 “네 근육은 날개 같아”라고 받아치는 정도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TV 예능에 남성이나 젊은 여성만 등장하는 건 이제 식상해졌다”며 “시대가 변하면서 주 시청층인 중년 여성들은 그동안 조명 되지 않은 또 다른 중년 여성이나 현역에서 은퇴한 여성의 삶을 궁금해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성 연예인은 성별과 연령이라는 이중 잣대로 평가돼 왔지만 사회가 변했다”고 덧붙였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