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관 합의 깨면서 책 정가제 흔들려는 정부 이해 안돼”

입력 2020-09-18 04:07
윤철호대한출판문화협 회장이 14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출판문화계 핫이슈인 도서정가제 개정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권현구 기자

정부의 도서정가제(이하 도정제) 개정 움직임에 출판계가 술렁대고 있다. 도정제는 서점이 출판사가 정한 가격에 도서를 판매하게 하고 할인을 하더라도 최대 15%(현금 할인 10%+마일리지·사은품 등 간접 할인 5%)까지만 허용하는 제도다. 출판사와 서점을 보호하고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다양하고 수준 높은 도서를 제공하기 위한 취지로 2002년 법제화돼 이듬해 2월 시행됐다. 2008년, 2012년 제도를 일부 개정했고 2014년 11월 정가제를 강화하는 내용으로 보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정제는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3년마다 재검토해 폐지, 완화, 또는 유지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한 일몰법이다. 오는 11월 20일이 개정 시한인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7월 도정제를 완화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출판계가 강력 반발하고 있다. 출판 관련 30여개 단체들은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만들어 대응하고 있다.

대표적인 출판 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 윤철호 회장을 지난 14일 협회에서 만나 입장을 들어봤다. 도서출판 사회평론 대표인 윤 회장은 2014년 한국출판인회의 부회장으로 현 도정제의 산파 역할을 했다. 2017년 2월 제49대 회장에 취임했고 지난 2월 재선됐다. 그는 공대위 공동대표 6명 가운데 한 명이다.

-문체부가 도정제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가.

“종이책은 도서전 판매, 장기 재고도서에 대해 적용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전자책은 할인율을 20~30%로 확대하고 연재 중인 웹소설·웹툰은 완결 전까지 유예할 방침인 것으로 알고 있다. 문체부와 출판계, 전자출판계, 유통계(도소매 서점), 소비자단체 등이 참여하는 민관협의체를 지난해 7월 구성해 16차례 도정제 개정 방안을 논의한 끝에 지난 6월 사실상 합의안을 도출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전면 재검토를 들고 나온 것이다.”

민관협의체 합의 내용은 재정가(다시 책정한 정가) 허용 시점을 현행 출간 후 18개월에서 12개월로 단축, 정부 도서관 등 공공기관에 대한 가격 할인 10%까지만 허용, 웹툰·웹소설 등의 정가 표시 의무 완화, 판매에 준하는 장기 대여 제한 등이다.

-문체부의 재검토에 대한 공대위 입장은.

“도정제의 틀을 흔드는 것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 문체부가 주도해 끌고 온 민관협의체에서 합의한 것을 제처두고 재검토하자는 건데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럴 거면 민관협의체는 왜 만들었고, 10여 차례 협의는 왜 했나. 민관협의체에서 합의된 내용은 문체부 장관까지 오케이(동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돌연 문체부 입장이 바뀌었다. 청와대 쪽에서 누군가가 개입해 방향을 튼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공대위가 출판계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나.

“공대위는 출판사, 서점, 작가, 독자모임, 도서관, 전자출판 등 관련 분야 36개 단체로 구성돼 있다. 출판단체는 대부분 참여하고 있다. 출판계에서 특정 사안을 놓고 이렇게 많은 단체들이 모여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 가히 문화적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그만큼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현행 도정제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할인율을 확대하거나 예외를 인정하면 출혈 경쟁을 촉발해 출판 생태계에 큰 혼란이 올 수 있다. 온라인서점이나 대형 서점과의 할인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작은 서점들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출판사들도 할인 손실을 메우려는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들로부터 도서 공급가격(공급률)을 낮춰 달라는 압력을 받게 될 게 뻔하다. 중소형 출판사들이 특히 어려워질 텐데 그러면 신간이나 좋고, 다양한 책을 펴낼 여력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책이 제값을 받지 못하면 대다수 작가들도 피해를 보게 된다. 과거 출판시장이 그랬다.”

-도정제가 문화 다양성을 확대하기는커녕 부정적인 효과만 키웠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뉴미디어의 성장으로 전통적인 출판시장이 하락하는 흐름 속에서 그나마 도정제가 출판 생태계를 떠받치는 버팀목 역할을 했다. 신간 발행이 늘었고, 독립서점들이 많이 생겨났고, 신생 출판사도 속속 등장해 다양한 책으로 도전하고 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출판사는 2013년 4만4146개에서 2018년 6만1084개로 증가했다. 신간 발행종수도 2013년에는 6만1546종으로 전년보다 7.9% 줄었지만 2014년부터 증가세로 돌아서 2017년 8만130종으로 늘었다. 순수서점은 계속 줄고 있지만 감소폭이 완만해졌고 독립 서점도 2014년 101개였으나 지난해에는 650개가 됐다.

-정가를 강제하는 것은 지나친 규제 아닌가.

“책은 문화공공재다. 시장경제 논리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도정제를 도입한 것 아니겠나. 영미권 국가는 자유 가격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등 여러 선진국들이 도정제를 시행하고 있다. 자국 문화와 출판시장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프랑스는 오프라인 서점에서만 정가의 5% 이내 할인을 허용하고 온라인 서점에는 할인과 무료배송을 금지하는 등 우리나라보다 제도가 더 엄격하다.”

-지난해 도정제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에 20만명 이상이 동의했다. 이런 의견도 고려해야 하지 않나.

“그걸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단기적인 이익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출판 생태계가 망가지면 독자들도 피해를 보게 된다. 지금은 도정제의 장점들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지켜봐 주고 격려해 줬으면 좋겠다.”

-도정제가 대형 출판사와 서점들의 기득권을 공고하게 하는 제도라는 지적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대형 출판사나 대형 서점들은 도정제가 없으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 오히려 작은 서점, 작은 출판사, 작가들이 도정제를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왜 그렇겠나.”

-우리나라 책값이 비싼 편인가.

“출판 선진국들에 비해, 국민소득 차이를 고려해도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니다. 도정제 강화 후 책값 인상률이 이전보다도 떨어졌다.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보다도 낮다. 도서정가제로 책값이 비싸서 독서율이 떨어졌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문체부의 2019년 국민 독서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성인들이 독서하기 어려운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요인은 ‘책 이외의 다른 콘텐츠 이용’으로 29.1%였고 ‘책 구입이 경제적으로 부담이 돼서’는 1.0% 였다.”

-구간(舊刊)은 예외로 해도 되지 않나.

“2014년 11월 이전에는 출간 후 1년6개월이 지나면 무제한 할인이 허용됐다. 그러다보니 대폭 할인된 구간이 많이 팔리고 신간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가 어려웠다. 구간이 많이 팔리면 신간에 대한 수요는 줄게 되고 출판사들은 신간 출간을 꺼리게 된다. 지금도 구간은 출판사가 정가를 마음대로 낮춰 책정할 수 있다. 예외로 해 달라는 것은 정가를 유지하면서 싸게 파는 것처럼 해 독자들을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전자책은 왜 안 되나.

“전자책의 정가는 종이책의 70% 정도가 권장되고 있다. 전자책을 예외로 하거나 할인을 확대하면 과열 할인 경쟁, 대형 플랫폼의 시장지배력 확대, 창의적인 중소 전자책업체 고사 등 여러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다. 한국웹소설협회, 한국전자출판협회 등이 공대위에 참여하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전자책은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발급받지 않으면 도정제 적용을 받지 않아도 된다. 출판물로 등록해 부가가치세 면제 혜택은 누리면서 도정제는 예외로 해 달라는 건 이중 특혜를 요구하는 것이다. 무료보기 등 전자책시장에서 일반화된 마케팅 기법은 지금도 ‘대여’로 취급해 허용하고 있다.”

-출판사들의 차등 공급률부터 개선해야 하는 거 아닌가.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과 동네 서점에 공급하는 도매가격이 다른 것은 서점 간 공정한 경쟁을 제약하는 조건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필요성에 공감하지만 출판사들이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에 을의 입장이라 개선하기가 쉽지 않다. 출판계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도정제 논란이 어떻게 해결되는 게 바람직하나.

“출판문화계가 오랜 기간 논의해 도출한 합의안을 정부가 존중해야 한다. 정책 결정과정에 있어서 민간 부문의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키울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출판 생태계를 혼란에 빠뜨릴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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