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의학 칼럼] 우리 시대가 바라는 관계성이란

입력 2020-09-18 17:35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사무엘상 19장 10절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생명은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 대상이라는 내용을 생각해보자. 한 중학교 교사에게 이런 간증을 들은 일이 있다. 가장 지도하기 힘든 아이들이 중학생이라는 말이었다. 그중 특히 2학년 아이들이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잘 대해 주면 만만하게 보고, 호통을 치면 무서워하지도 않는다는 말도 했다. 이 교사가 어느 해인가 중2 담임이 됐다. 고민에 빠져 있던 어느 날 한 아이가 찾아왔다.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이 아무리 엄하게 해도 무섭지 않아요. 반면 선생님이 우리가 잘못한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우리를 포기하는 게 가장 무서워요.”

이 이야기를 들은 교사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교육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교육관이 바뀐 셈이었다.

그 후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이 있으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얘야, 나는 널 포기하지 않아. 네가 잘못되면 그건 내 책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너를 위해 기도할 거야. 네가 자꾸 다른 길로 가면 나는 채찍질해서라도 너를 바르게 세울 거야. 다 너를 포기해도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자 아이들이 변했다. 학생들이 교사의 사랑을 느낀 것이었다. 아이들은 교사의 가르침을 달게 받아들이게 됐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시대가 바라는 관계성에 대해 생각해봤다. 진심 어린 인격이 없다면 관계성은 형식밖에 남지 않는다. 복잡한 관계 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진실과 애정이 담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인격이 빠진 인사를 하고 조문을 한다. 인격이 배제된 채 안부를 묻기도 한다. 껍데기만 남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 당신의 전인격을 다 보여주셨다. 형식적인 몇 마디 말로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때로는 분노하셨고 질투하셨으며, 채찍을 들기도 하셨다. 가슴 아파하셨고 슬퍼하시며 눈물 흘리셨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리며 돌아가셨다. 당신의 전인격을 우리에게 던져 주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전인격적인 헌신이 우리에게 감동으로 남았다.

인격적으로 사람을 대한다는 것은 칭찬해 주거나 웃는 표정을 짓는 겉모습이 아니다. 진심으로 아파하고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 겉이 아닌 내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환자들을 정성껏 진료한다. 긴 시간 진료한다. 5분이면 끝날 진료를 20분까지도 한다. 기다리는 환자들이 이로 인해 힘들어한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하지 못한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더 빨리 환자를 진료하면 나도 다른 의사들처럼 5분마다 환자를 볼 텐데. 그러면 병원 매출도 더 오를 수 있는데….”

그러나 생각만 할 뿐이다. 결국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의사와 환자는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처음 됐을 때는 나도 의사란 모름지기 환자의 질병에 대해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진료와 치료만 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사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점점 의사는 생명을 다루는 존재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생명은 전인적으로 다뤄야 하는 인격적 대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의사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관계성은 생명과 생명의 만남을 의미한다. 생명은 인격의 대상이며 인격에 반응하고 인격만을 받아들이는 존재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인격을 주셨다. 이런 인격적 만남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셨다. 우리도 이웃을 향해 우리의 전인격을 줄 수 있을 때 좋은 관계가 맺어진다.

오늘 하루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말길 권한다. 대신 여러분의 인격을 진지하게 전하길 바란다.

이창우 박사 (선한목자병원 원장)